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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과 준제의 원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옴 남
호신진언(護身眞言) 옴 치림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本心微妙 六字大明王眞言) 옴 마니 반메 훔
준제진언(准提眞言) 나무 사다남 삼먁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정법계진언은 지혜의 불꽃으로 법계를 맑게 해 달라는 진언이고, 호신진언은 몸을 지켜 행복과 평화가 오기를 비는 진언입니다. 육자대명왕진언은 관세음보살의 미묘한 본심을 여섯 글자에 담은 크고 밝은 진언으로, 여의주 같고 연꽃처럼 맑은 불보살의 세계를 부릅니다. 준제진언은 칠구지, 곧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각(正覺)을 이루신 부처님들께 귀의하는 말로 시작하는 진언입니다.

아금지송대준제(我今持誦大准提) 제가 이제 대준제진언을 지성으로 외웠으니

 

바로 앞의 준제진언을 외웠으니, 그 공덕으로 뒤에 이어지는 '즉발보리광대원'부터 '원공중생성불도'까지의 바람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원을 세우는 대목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여기서의 준제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범위를 넘어선 준제보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즉발보리광대원(卽發菩提廣大願) 곧바로 깨달음을 향한 큰 원을 일으키게 하시고

 

보리(菩提)는 깨달음입니다. 어설픈 깨달음으로는 부족하고, 보살의 경지에서 이룬 깨달음이어야 보리라 할 수 있습니다. 보살이 거치는 52단계의 수행 계위에서 드러나는 수행의 경지와 그 수행 자체가 보리입니다.

원아정혜속원명(願我定慧速圓明) 제가 선정과 지혜를 얻어 속히 밝아지게 하시고

 

정혜는 정(定)과 혜(慧)를 말하며, 여기에 계(戒)를 더해 삼학(三學)이라 부릅니다. 불교에서 익히고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정은 마음이 한결같아 흔들림이 없는 상태로, 선정(禪定)의 줄임말로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혜는 세속의 지혜와 달리 반야(般若)의 절대적 지혜를 가리킵니다.

정혜는 수행을 완성해 가는 보살 가운데서도 부처님에 버금가는 깨달음을 얻은 뛰어난 보살이 이르는 경지입니다. 『천수경』을 독송하는 사람은 이 구절에서 가장 높은 보살도에 이르게 해 달라는 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공덕을 다시 묻다

원아공덕개성취(願我功德皆成就) 제가 공덕을 모두 성취하오며

 

절에서 공덕만큼 자주 듣는 말도 드뭅니다. 이 단어를 빼면 법문을 하기가 곤란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공덕만큼 제대로 실천하기 어려운 말도 없습니다. 불사(佛事)나 기도에 열심히 동참하고 보시를 많이 하면 공덕이 된다는 말은 구구단처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정말 공덕이 그런 것일까요. 불자들이 신앙생활이라며 하는 일 가운데 상당 부분은 사실 공덕과 관계가 없습니다.

양무제와 달마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비도량참법』을 널리 퍼뜨린 것으로 알려진 양무제는 불심이 깊어 수백 개의 절을 짓고 수천 명의 스님을 공경했습니다. 그가 자신 있게 달마에게 그 공덕을 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공덕이 없다'였습니다.

『금강경』은 공덕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더라도 이 경의 한 구절을 읽고 외우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금강경』이 강조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최고의 공덕은 수행입니다.

그런데도 신도를 구제의 대상이나 수행으로 이끌 제자로 보기보다 재정의 원천으로 대하는 절이 적지 않습니다. 스스로 공덕을 짓겠다며 내미는 돈을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 참된 공덕이 무엇인지 공들여 가르칠 까닭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돈과 연결 짓고, 일 년 내내 무슨 기도에 동참하라는 일정을 짜 놓고, 빠지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곳도 많습니다. 돈을 보시하지 않으면 공덕을 지을 기본조차 안 된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수행도량이라는 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신도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 업을 불사 비용이나 기도 동참금으로 때우려는 생각부터 합니다. 방생 때는 관광버스 수십 대가 가득 차도 교리 공부나 본격적인 수행에는 몇십 명이 모이기도 어렵습니다. 부처님과 보살을 소원을 들어주는 신으로 받아들이고,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라는 사실은 이론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자신들이 낸 돈으로 절의 한 해 수입이 수십억 원이 되어도 그 돈이 불교답게 쓰이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양쪽이 이렇게 맞아떨어진 탓에 한국 불교의 문제가 좀처럼 바로잡히지 않습니다.

신도들이 부지런히 공부해서 무엇이 참된 공덕인지 스스로 깨닫고, 부처님 이름만 내세우면 무엇이든 신도들이 해결해 준다는 타성에 젖은 쪽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고 한국 불교를 위하는 길입니다. 근래 절에 며칠 묵으며 스님들과 같은 일과를 지내는 템플스테이가 활기를 띠고 수행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장엄과 성불

원아승복변장엄(願我勝福遍莊嚴) 제가 이룬 복으로 온 세상이 장엄되며

 

장엄(莊嚴)은 본래 위엄 있고 품위 있게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불단을 정성껏 꾸미는 일이 장엄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장엄은 내가 지은 공덕으로 세상의 모든 중생이 넉넉한 이익을 얻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공덕을 지어 복이 생겼다면 나 혼자 편안해지는 데 쓰지 않고, 나와 아무 관련 없는 중생들과도 그 이익을 나누겠다는 이타(利他)의 원을 장엄이라 부른 것입니다. 본받을 만한 대목입니다.

원공중생성불도(願共衆生成佛道) 원컨대 모든 중생과 함께 불도를 이루어지이다

 

마침내 나의 원으로 다른 중생들도 함께 부처의 경지에 오르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런 마음으로 교화를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부처를 이루었으니 모든 중생도 나와 같은 자리에 이르게 하고, 고해를 건너 번뇌가 모두 사라진 열반에 들게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품을 수 있는 생각 가운데 이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천수경』은 석가모니만이 아니라 이 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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