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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는 자성이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니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忘) 마음이 사라지면 죄 또한 사라지네
죄망심멸양구공(罪忘心滅兩俱空) 죄와 마음이 함께 사라져 공해지면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이것을 참된 참회라 이름하네

 

『천수경』에서 풀이하기 가장 어려운 대목이 이 게송입니다. 배우는 쪽에서는 내용 자체가 어렵고, 설명하는 쪽에서는 또 다른 곤란함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천수경』은 진언을 외우고 관세음보살께 의지하는 신앙으로서의 불교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수행의 본질과 마음을 다루고 현상계의 이치를 불법(佛法)으로 드러내는 선불교(禪佛敎)의 시각으로 읽어야 합니다. 『천수경』에 이런 두 얼굴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읽으면서 모순에 빠지지 않습니다.

죄가 무자성(無自性)이라는 말은 죄에 스스로 정해진 성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말이나 행동이 무조건 죄가 된다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미국 시카고를 무대로 한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는 사형을 받아도 마땅할 범죄를 수없이 저지른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대공황 때 시카고에 무료 급식소를 열어 끼니를 잇기 어려운 실업자들에게 날마다 밥을 먹였습니다. 1927년 한 해 수입이 1억 달러로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그에게 급식 비용은 새 발의 피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밥이 아니면 굶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에게 그는 천사였습니다. 마피아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그 급식으로 끼니를 이었던 한 노인이 실제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반대의 예도 있습니다. 한때 세계 최고의 부자로 꼽혔던 한 소프트웨어 기업 창업자는 자선가였던 아내의 영향을 받아 부부의 이름을 딴 자선재단에 세계 최대 규모의 돈을 내놓았습니다. 수십 조 원 규모의 이 재단 덕분에 해마다 20만에서 30만 명이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재단은 질병 퇴치와 빈곤 구제를 가장 큰 가치로 삼고, 아프리카에서는 에이즈 같은 질병에 걸린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하는 사업에 큰돈을 지원합니다. 현대의 관세음보살이라 불러도 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의도와 상관없이 재단이 지원하는 사업이 들어선 지역에서는 원래 있던 현지 의료 기관들이 인력을 잃고 제 기능을 못 하는 일이 생겼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지원 사업의 급여와 조건이 월등하다 보니 그렇잖아도 몇 안 되는 현지 의료진이 그쪽으로 몰리기 때문입니다. 작은 병원에서 진료받아야 할 사람들은 그나마 있던 기회마저 잃게 됩니다. 게다가 지원이 에이즈 같은 몇몇 질병에 집중되다 보니 설사 같은 흔한 병은 뒷전으로 밀린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두고 '에이즈에 걸린 엄마는 재단 덕에 살고, 홍역에 걸린 아이는 치료를 못 받아 죽어 간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논리의 비약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선과 악의 기준이 그 일을 겪는 사람에 따라 뒤바뀌는 두 예를 보면 선과 악, 그리고 죄가 무자성이라는 말이 조금은 실감이 납니다.

달리 말하면 마음 따라 일어난 일의 결과에 죄라는 이름을 붙일 뿐, 죄가 모든 것의 본질은 아닙니다. 『금강경』에서 보살은 이름이 보살일 뿐 실은 보살이 아니며 중생은 이름이 중생일 뿐 실은 중생이 아니라고 한 대목이 가르치려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사상과 같은 맥락입니다.

『천수경』은 앞부분의 '아약향도산 도산자최절' 대목에서 내가 죽은 뒤 받을 죄업을 소멸해 달라고 관세음보살께 철저히 기원하는 신앙의 불교로 일관합니다. 그러다 여기에 와서는 죄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불교에서 수행의 불교로 넘어간 것입니다.

어차피 같은 불법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의 불교에서는 선과 악이 정해져 있고, 그 과보인 지옥도 실재하며, 내 힘이 아닌 부처나 보살의 힘으로 지옥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수행의 불교에서는 선과 악, 죄가 모두 무자성이어서 공(空)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도 없고, 그러니 『천수경』에 기댈 필요조차 없어집니다. 모든 것을 내 마음의 작용으로 보는, 선불교의 가장 높은 단계입니다.

죄와 죄라는 마음이 함께 사라져 공해지면 그것이 참된 참회라는 '죄망심멸양구공' 구절은 누구든 오래 곱씹어 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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