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본성 있지 않으며 나의 소유도 또한 허망한 것인데
어찌하여 모든 여래께서는 그의 몸이 있으리요
문수사리 보살의 게송은 첫머리에서 나의 본성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을 생각할 때는 우선 공(空)이라는 개념을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지금 품고 있는 공의 관념이 오히려 이해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은 그만큼 간단한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만의 특별한 것
나의 본성, 곧 사람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사람과 동물을 가를까요. 더 직설적으로 말해 사람만이 가진 특별한 것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인 가운데는 이런 물음 자체가 신을 의심하는 일이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 속의 많은 사상가들이 저마다 사람을 정의해 왔습니다. 생각하는 갈대, 사회적 동물이라 부르기도 하고, 언어와 도구를 쓰는 것을 사람의 특징으로 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모자라 보입니다.
평생 침팬지 연구에 몸담아 영장류 연구에 새 이정표를 세운 한 학자의 성과를 보면, 위에서 꼽은 사람의 특징을 동물도 지니고 있다는 데 반론을 펴기 어려울 만큼 정밀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종교가 요구하는 자비와 사랑, 헌신과 봉사는 사람만의 것일까요. 그래야 마땅해 보입니다. 이것마저 무너지면 종교가 존재하는 의미의 상당 부분이 현실성을 의심받게 되니, 어쩌면 마지막 보루입니다.
사슬을 당기지 않은 원숭이
그런데 한 천문학자와 그의 아내가 함께 쓴 책에 소개된 실험은 이 보루마저 흔들어 놓습니다.
마카크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 사는 긴꼬리원숭이과 마카크속 원숭이를 통틀어 이르는 이름입니다. 이들은 사촌들로 이루어진 결속력 강한 무리를 지어 삽니다. 겉모습만으로는 서로 피가 얼마나 가까운지 가릴 수 없으니, 굳이 목숨을 걸고 서로를 구하지 않아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실험 장치는 이렇습니다. 원숭이가 사슬을 당겨야만 먹이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슬을 당기면 옆방에 있는 혈연관계가 없는 원숭이에게 전기 충격이 가고, 사슬을 당긴 원숭이는 유리창 너머로 그 원숭이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보게 됩니다. 사슬을 당기지 않으면 자신이 굶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정을 알아차린 원숭이들은 그 뒤로 자주 사슬 당기기를 거부했습니다. 한 실험에서는 사정을 알고도 계속 사슬을 당긴 원숭이가 13퍼센트뿐이었고, 나머지 87퍼센트는 스스로 굶는 쪽을 택했습니다. 전기 충격을 직접 당해 본 원숭이는 사슬 당기기를 훨씬 더 강하게 거부했습니다. 동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견디지 못하는 무언가가 원숭이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무리 안의 사회적 관계 때문이든 원숭이의 본성 때문이든, 이 실험은 동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마음이 사람 아닌 존재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저자들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원숭이에게 이런 잔인한 거래를 강요한 실험자와 동료를 다치게 하느니 극심한 배고픔을 참은 원숭이 가운데 어느 쪽에 마음이 가느냐고 묻는다면, 우리의 도덕적 공감은 실험자 쪽으로 향하지 않을 것이라고. 원숭이는 교회 주일학교에 다닌 적도, 십계명을 들어 본 적도, 지루한 윤리 수업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의 기준으로 보아 모범이라 할 만한 도덕적 바탕 위에서, 용기 있게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적어도 이 실험에 한해서는 원숭이들에게 영웅적인 행동이 가장 중요한 행동 규범이었습니다.
입장을 바꾸어 사람이 원숭이 과학자에게 붙잡혀 같은 실험을 받는다면 사람도 원숭이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요. 저자들은 인류 역사에서 남을 위해 죽음을 택해 존경받는 사람은 소수이고, 그런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읽는 이를 허탈하게 만듭니다. 같은 자리에 놓이면 많은 사람이 굶지 않으려고 사슬을 당기고, 죽어 가는 상대에게는 그것이 네 업이다, 내가 살아야 너를 위해 기도라도 하지 않겠느냐, 모두 전생의 업 때문이라며 인과와 알량한 자비를 내세울지 모릅니다. 저자들의 마지막 말은 오히려 작은 위안이 됩니다. 사람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이니까요. 물론 나는 87퍼센트의 원숭이처럼 굶는 쪽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존재라는 사람, 그 가운데서도 종교인이 원숭이보다 고귀하게 행동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이 실험은 보여 줍니다.
요즘 출가자 가운데는 수행이나 정신적 성숙과 관계없이 출가 그 자체로 신분이 높아졌거나 특별한 자리에 올랐다는 듯이 행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불교의 출가자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면, 이 나라 사람들 가운데 유독 불교에만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말이 되는데 과연 그럴까요.
불교가 말하는 나
사람의 본성이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나(我)는 이것과 구별해야 합니다. 생각의 범위를 아무리 넓혀 사유해도 그렇게 붙잡은 실체가 곧 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나입니다.
불교에서 참된 나는 진여(眞如)로서의 나, 불성의 종자(種子)로서의 나, 장차 부처를 이룰 중생으로서의 나일 때 존재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이 나의 본성이고 중생의 본성입니다.
게송에 비추어 보면, 내 본성조차 없는데 하물며 나의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 「나의 소유도 또한 허망한 것인데」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어찌하여 모든 여래께서는 그의 몸이 있으리요」는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인데, 중생의 본성이 본래 있지 않으니 부처의 몸인들 어찌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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