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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법이 환술과 같음을 아시사 통달하여 장애가 없고
마음은 청정하여 온갖 집착 떠나사 모든 중생을 이해하고 인도하시네

 

문수사리 보살의 게송이 이어집니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인데, 이 무렵의 게송들은 앞부분과 달리 공부의 깊이를 시험하듯 하나같이 정곡을 찌릅니다. 대지문수사리보살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게송들이니 읽는 쪽도 조금 더 집중해야 합니다.

국어사전은 환술을 「남의 눈을 속여 괴상한 것을 나타나 보이게 하는 기술」이라고 풀이합니다. 법(法)이 환술과 같다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구법(求法)은 엉뚱한 것을 얻으려는 망상이라는 말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속고 있는 꼴이 됩니다. 당연히 그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법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이 게송의 법과 불법의 법은 무엇이 다를까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법은 또 다른 법일까요. 욕심내지 말고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세간의 법, 출세간의 법

어릴 적 딱지치기나 구슬치기에도 분명한 법이 있었습니다. 그 법을 어기면 동네 아이들이 놀이에 끼워 주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면 사회와 국가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면 따돌림을 당하거나, 감옥에 가서 원치 않는 묵언 수행을 하게 됩니다.

세간의 법은 그렇다 치고 출세간의 법은 어떨까요. 세간(世間)은 쉼 없이 흘러 변하는 이 세상을 가리키고, 출세간(出世間)은 그 세상의 가치와 분별을 벗어난 세계를 뜻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출세간의 법은 이미 아주 많았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저마다 자기 법이 최고라고 확신하며 수행하고 있었고, 부처님은 뒤에 이들을 외도(外道)라고 부르셨습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당시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는 수행법을 모두 해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수행으로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밖에 이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비상비비상처는 삼계 가운데 무색계의 가장 높은 단계로, 욕심과 물질까지 벗어난 상당한 경지입니다. 중생이 지닐 수 있는 번뇌를 거의 다 떨쳐 낸 자리지만 여전히 윤회를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으로는 생사를 벗어날 수 없다. 내가 구하는 최고의 법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법을 보았다는 생각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수행자에게 가장 큰 마(魔)는 무언가를 체득했다, 법을 보았다, 견성했다며 오도송(悟道頌)을 읊는 바로 그 순간의 마음입니다. 제법무아, 곧 모든 법에는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은 그런 우쭐함을 경계하는 말로도 새길 수 있습니다. 물론 근본은 연기의 이치이고, 그 이치로 보면 모든 법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법무아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법을 보는 자가 나를 보는 것이지 썩어 없어질 이 몸을 보는 것이 부처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병든 박깔리 존자에게 하신 말씀으로 『잡아함경』에 전하고, 『금강경』도 모습이나 소리로 여래를 찾으면 삿된 길이라고 합니다. 이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 실제로 살았던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이 물음이 바로 게송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고민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끝이 없으니 이 정도로 그칩니다. 다만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으레 그렇다」는 식의 상투적인 해석 때문에 불교가 발전하기는커녕 점점 불교답지 않게 되어 간다는 점입니다. 종교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하드웨어를 지닌 불교가 소프트웨어를 가꾸는 일을 소홀히 하다가 하드웨어마저 녹슬어 가는, 정말 심각한 상황입니다.

게송으로 돌아가면, 「법이 환술과 같음을 아시사 통달하여 장애가 없고」는 법도 보는 안목과 수준에 따라 깊고 얕음이 달라서 잘못 보면 마술에 속듯 환술과 같아지는데, 부처님은 이 이치를 바로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은 청정하여 온갖 집착 떠나사 모든 중생을 이해하고 인도하시네」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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