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 사람들 방일하고 오욕에 집착하여 잘못 분별하여 온갖 고통 받거늘
부처님 법 받들면서 항상 마음 거두어 제도하기를 서원함이 그의 행이로다
문수사리 보살의 게송입니다. 오욕(五慾)은 사람이 떨치기 어려운 본능적인 욕망을 말합니다. 흔히 재물욕, 성욕, 식욕, 명예욕, 그리고 자고 싶은 수면욕을 꼽습니다.
서원(誓願)은 보살이 중생을 건지겠다고 부처님께 발원하고 다짐하는 맹세입니다. 여기서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며 중생을 돕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여신도를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쓰임입니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보살들의 서원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 차이는 거의 무시해도 좋습니다. 보살들의 이런 맹세를 크게 네 가지로 묶은 것이 사홍서원(四弘誓願)이며, 법회를 마칠 때마다 함께 읊습니다.
중생이 끝없이 많아도 모두 건지겠습니다.
번뇌가 한량없어도 반드시 끊겠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헤아릴 수 없어도 모두 배우겠습니다.
위없는 불도를 꼭 이루겠습니다.
사홍서원에는 대승 불교의 핵심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곧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사상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보살 사상의 뿌리는 내 성불을 늦추더라도 중생을 먼저 건지겠다는 이타의 정신입니다.
이 한 가지만 분명히 해 두어도 불교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절과 스님들이 신도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른 말이 나올 여지가 없습니다.
「나와 내 가족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는 욕심을 불심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게송이 말하는 보살의 행은 오욕에 매여 괴로워하는 세간 사람들을 건지겠다고 서원하는 데 있습니다.
중생이 의지가 없고 병에 얽히어 항상 악취에 빠져
삼독을 일으켜서 크고 맹렬한 불에 항상 타거늘
깨끗한 마음으로 그를 제도함이 그의 행이로다
문수사리 보살의 게송입니다. 삼독(三毒)은 사람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 곧 탐욕과 진에와 우치를 말합니다. 탐욕은 욕심내는 마음, 진에는 화내는 마음, 우치는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고약한 것이 우치입니다. 욕심과 화는 생각보다 다스리기 쉽고, 바깥 형편이 대신 다스려 주기도 합니다.
욕심과 화는 형편 따라 줄어든다
사형수의 가장 큰 욕심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감방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 위에서 평생 내려오지 말고 살라 해도 그러겠다고 할 만큼 절박합니다. 그러니 잘 먹고 잘 입고 싶다는 욕심이 드는 것 자체가 어쩌면 형편이 괜찮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중생은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어깨가 배겨 다시 일어나고 싶어 합니다. 이 때문에 지나치게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사람의 몸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중생의 업이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최소한의 분수는 지키자는 것입니다.
화도 따져 보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어려서 선생님에게 억울하게 맞아 본 사람이 숱하고, 군대에서 계급에 눌려 참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화를 참는 일도 상대에 따라 달라지니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억지로 눌러 참는 데서 그치지 말고, 스스로 내는 참음의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아는 것이 병든 상태
어리석음은 사정이 다릅니다. 어리석을 치(痴) 자를 들여다보면 병들 녁(疒) 아래에 알 지(知)가 들어 있습니다. 병(病) 자에서 병(丙) 대신 지(知)를 넣은 모양이니, 아는 것이 병든 상태라고 풀어 볼 수 있습니다. 글자의 내력을 따진 설명은 아니지만 꽤 그럴듯한 풀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은 무명(無明)입니다. 12연기도 무명에서 시작합니다. 무명은 말 그대로 밝음이 없다는 뜻인데, 이 간단한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경전에서 빛은 흔히 법이나 진리를 나타냅니다. 빛은 곧 밝음이니, 밝음이 없는 무명은 깨닫지 못한 모든 마음을 가리킵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무명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명은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지 못하는 상태이고, 그 본래 성품이 바로 불성입니다. 나는 부처라는 밝은 확신을 갖지 못하니 어리석은 중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밝음인 불성이 본래 성품이고 밝음을 잃은 번뇌에는 본래 성품이 없다(無自性)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낮에 방 안에 촛불 하나를 켜 두면 아무 표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어 온 세상이 어두워져도 방 안은 촛불의 밝음으로 가득합니다. 무명이 홀로 존재할 수 있다면 촛불이 있어도 방은 어두워야 할 것입니다. 무명 자체에는 자성이 없다는 논리가 여기서 섭니다.
꼭 기억해 둘 것이 있습니다. 우치는 알아야 할 것을 몰라서 어리석은 것만이 아니라, 몰라도 될 것을 알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리고 이 우치가 원인이 되어 탐욕과 진에도 일어납니다.
우물 속에 매달린 사람
삼독과 무명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옛 비유가 경전에 전합니다. 게송을 따로 풀 필요가 없을 만큼 딱 들어맞습니다.
어떤 사람이 광야를 헤매다가 크고 사나운 코끼리에게 쫓깁니다. 미친 듯이 달려도 의지할 곳이 없던 그는 언덕 위의 우물을 발견하고, 우물 속으로 드리운 나무뿌리를 붙잡고 내려가 숨습니다. 그런데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그 뿌리를 갉고 있고, 우물의 네 벽에서는 독사 네 마리가 그를 물려 하며, 우물 바닥에는 큰 독룡이 있습니다. 그는 독사와 독룡이 무서워 떨고, 붙잡은 뿌리는 뽑힐 듯 흔들립니다. 그때 나무에 달린 벌집에서 꿀 다섯 방울이 그의 입에 떨어집니다. 나무가 흔들려 벌집이 무너지자 벌들이 날아와 그를 쏘고, 들에서 불이 일어나 그 나무를 태웁니다.
광야는 무명의 긴 밤을, 그 사람은 범부를,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비유합니다. 우물은 생사를, 나무뿌리는 목숨을 가리킵니다.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이고, 쥐가 뿌리를 갉는 것은 목숨이 순간순간 줄어드는 모습입니다. 네 마리 독사는 몸을 이루는 사대(四大)를, 꿀은 오욕을, 그를 쏜 벌들은 삿된 생각을 비유합니다. 들불은 늙음과 병을, 바닥의 독룡은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제 게송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그래도 마음에 와닿는 것이 없다면, 가장 독한 독이 이미 몸 깊숙이 퍼졌다는 신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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