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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력홍심상호신(願力弘深相好身)
원력은 넓고 깊으며 그 모습은 거룩하시고

 

중생을 구제하려는 관세음보살의 원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넓고 깊으며, 중생을 건지는 그 모습은 거룩하다는 구절입니다.

원력(願力)은 간절히 바라는 마음의 힘입니다. 여기서 원(願)은 한 개인이나 보살 자신만이 아닌, 모든 이를 위한 바람이고, 원력은 그 바람을 이루어 내는 힘입니다.

사람은 보살과 다릅니다. 남을 위한 원이라 해도 그 크기와 깊이에서 차이가 큽니다. 실제로 사람의 원은 개인의 희망 사항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조금만 들여다보면 서로 부딪히는 이해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모순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장례업을 하는 사람이 사업이 번창해 부자가 되면 시주를 많이 하겠다고 원을 세우고 기도를 부탁한다고 해 봅시다. 그 사업은 사람이 많이 죽어야 잘됩니다. 기도를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 편히 축원할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가 됩니다.

입시를 앞둔 자녀를 둔 불자들은 합격 기도를 올리고, 절에서도 수능 백일에 맞춰 기도 동참을 권합니다. 그러나 정원은 정해져 있으니 내 아이가 붙으면 누군가는 떨어져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원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오히려 줄어듭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같은 기도를 한다면 계산은 더 복잡해져서, 불교의 기도 성취율과 기독교의 기도 성취율을 따져야 할 지경이 됩니다.

정성으로 올리는 기도를 억지스럽게 깎아내린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순수한 마음을 탓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일이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똑바로 보자는 것입니다. 세속의 욕망을 채우려는 이런 기도는 불안한 신도와 종교 집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생겨나는 일입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기도가 노력의 결과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종교에 이용당하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지은 업의 결과는 반드시 스스로 받는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다면, 노력은 하지 않고 기도만으로 좋은 결과를 바라는 것은 부처님 말씀에도 어긋납니다. 세속적인 바람이 이루어지느냐는 기도와 상관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종교를 가진 사람은 세속의 바람보다 관세음보살 같은 원을 세워야 합니다. 그 원을 이루어 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룬 것을 다른 사람에게 차별 없이 베풀 수 있는 힘까지 갖추어야 합니다. 『천수경』이 말하는 원력은 그런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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