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아조득선방편(願我早得善方便)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며 세우는 네 번째 원은 중생을 건질 수 있는 훌륭한 방편을 하루빨리 얻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방편이라는 말은 앞에서 이미 다루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앞에 착할 선(善) 자가 붙었습니다. 방편은 흔히 선교방편(善巧方便)과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목적을 이루는 방법은 동기가 순수하고 좋아야 하며[善], 그 방법 또한 절묘해야[巧] 한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법이라면 그것부터가 선량해야 제대로 된 방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도가 원한다는 이유로 절에서 부적을 써 주거나 운명을 감정해 주는 일은 결코 방편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스님들만 애쓴다고 풀리지 않습니다. 좋은 날을 받아 달라거나 운이 좋은지 나쁜지 봐 달라는 부탁은 절에서 흔히 듣는 일이고, 그런 것은 모른다고 답하면 오히려 자기를 무시한다거나 운이 너무 나빠 말을 피한다고 받아들이는 신도도 적지 않습니다.
용한 점쟁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사람들은 왜 이런 데 매달리고, 정말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는 걸까요. 적중률이 반반이라면 그 풀이에는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반반의 확률만으로도 용하다는 소문은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붙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날은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나쁘다고 답한다고 해 봅시다. 그래도 확률상 절반은 맞습니다. 맞힌 사람들이 다음에 다시 와서 남편이 진급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이번에는 모두에게 좋다고 답합니다. 역시 대충 절반은 맞습니다.
처음 백 명 가운데 쉰 명쯤이 맞았고, 그 쉰 명이 모두 다시 찾아온다면 그중 스물다섯 명쯤은 두 번 연속 적중을 경험합니다. 도사는 여기서부터 만들어집니다. 이 스물다섯 명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옵니다. 점을 보러 갈 때 혼자 가는 일은 드물고 대개 친구나 이웃과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소문이 한번 나기만 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용하다고 믿게 되는 구조가 숫자로 이미 짜여 있습니다.
사람의 심리도 한몫합니다. 자기에게 들어맞은 일은 오래 기억하고 그럴듯하게 합리화까지 해 주는 반면 빗나간 일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러니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습니다. 마지막 비결은 틀렸다고 따지는 사람에게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언가 숨긴 게 있지 않느냐고 되묻거나, 태어난 시가 틀려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오히려 밀어붙이면 됩니다.
점쟁이의 속성을 이렇게 따져 보는 것은 불교를 믿는다면 무속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실험은 친구끼리 장난으로나 해 볼 일입니다. 스님이라면 으레 운명 감정에 능하리라 여기는 심리가 있고, 그것을 이용해 세상을 어지럽히면서 방편이라고 둘러대는 이들이 있기에 굳이 짚어 둡니다.
『천수경』은 이런 중생의 마음을 알기에, 관세음보살이 베푸는 구제의 방법을 이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선방편(善方便)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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