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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원아속도일체중(願我速度一切衆)

 

자비로운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며 세우는 세 번째 원은 내가 하루빨리 모든 중생을 건질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일체중(一切衆)은 존재하는 모든 중생을 가리킵니다. 중생(衆生)은 불교 용어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말입니다. 보살은 보리살타를 줄인 말인데, 여기서 산스크리트어 살타(sattva)가 바로 중생을 뜻합니다. 한역에서는 이를 유정(有情)이라 옮겨, 감정이 있는 존재를 중생이라 불렀습니다.

식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는데, 그 말대로라면 이론상으로는 식물도 중생에 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보통 중생이라 하면 살아 있는 생물을 뜻하고, 그보다 더 좁혀 사람만 가리키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유식파가 본 중생의 세 가지 특징

불교의 유력한 학파인 유식파(唯識派)는 모든 존재의 성품을 세 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이것을 삼성(三性)이라 하는데, 본래 존재 일반을 설명하는 이론이지만 중생에 비추어 읽으면 중생의 특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은 어렵지만 중생이 어떤 존재인지를 거의 모범 답안처럼 짚어 주므로, 알아 두면 불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첫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입니다. 중생은 한 번 착각이나 망상을 일으키면 거기에 붙들려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꼭 이 경우입니다. 여기에는 선입관이나 욕망이 한번 생기면 그것을 이루려는 집착 때문에 판단이 흐려진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이런 집착은 때로 집념과 용기가 되어 일을 이루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개 나쁜 결과로 이어집니다. 반사적으로 굳어 버린 선입관과 스스로 만든 번뇌에 매달리는 이 성향을 불교는 중생의 가장 큰 특징으로 봅니다.

둘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입니다. 의타기성은 본래 모든 것이 다른 것, 곧 인연에 기대어 일어나는 성품을 말합니다. 중생의 삶에 비추면, 중생은 다른 것에 기대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것이 무슨 허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기대는 대상과 나 사이가 서로 이로운 관계라면 기댈수록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에 기댄다는 것은 결국 그것에 신세를 진다는 말이고, 기대던 대상에 변화가 생기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대는 대상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공기와 물, 햇빛, 먹을 것처럼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의지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만 어긋나도 중생은 곧바로 곤란해지고, 곤란해지지 않으려고 서로 얽힌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의타기성입니다.

셋째는 원성실성(圓成實性)입니다. 변계소집성의 집착을 걷어 냈을 때 드러나는 원만하고 진실한 성품을 말합니다. 이 성품이 있기에 우리는 앞의 두 가지 달갑지 않은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중생이 아무리 미혹해도 불교가 이 성품을 키워 주려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앞의 두 약점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진리와 깨달음을 찾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중생이 곧 부처요, 마음이 곧 부처요,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는 선언은 바로 이 성품 위에서 성립합니다. 중생은 겉으로는 아직 미망(迷妄)에서 헤매고 있지만 그 마음의 참된 성품은 불성(佛性)이어서 이미 깨달음을 온전히 이루고 있다는 것, 이 대전제가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 짓는 핵심 사상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논문이 되어 버리니 여기서 멈추지만, 이 대전제만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천수경』의 원아속도일체중은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면서, 내가 직접 모든 중생을 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비는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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