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며 세우는 마지막 열 번째 원은 내 몸 자체가 부처님의 법과 같아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원답게 나도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해 달라는 바람이고, 이것으로 관세음보살께 드리는 열 가지 원이 끝납니다.
법성신은 내 몸 자체가 법의 성품을 이룬다는 뜻이고, 이 몸 그대로 부처가 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엄청난 선언입니다. 내 마음이 부처라는 말은 불교에서 늘 듣는 말이지만, 이 몸으로 부처를 이루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밀교의 흔적
이 생각은 밀교(密敎) 수행의 최종 목표와 닿아 있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성불(卽心成佛)이 아니라 몸이 곧 부처라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은 대승불교 후기인 7세기 무렵 체계를 갖춘 밀교의 핵심 사상입니다. 『천수경』에 진언과 다라니가 들어 있고 법성신이라는 말까지 나온다는 것은 이 경이 밀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 보니 의문이 생깁니다. 대승불교와 그 뒤의 밀교는 불법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른데, 두 흐름이 섞인 『천수경』은 어떤 배경과 의도로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시각이 한데 모인 경전은 달리 없어서, 어찌 보면 중심을 잡기가 당혹스러운 경이 『천수경』이기도 합니다.
풀어야 할 물음은 두 가지입니다. 밀교가 아닌 현교(顯敎)는 『금강경』 등에서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지금의 몸으로 부처를 이룬다는 생각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밀교의 주장대로 몸으로 부처를 이룰 수 있다 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의 성품, 곧 법성(法性)이란 대체 무엇인가. 법성신을 밀교의 관점에서 풀이한 『천수경』 해설은 찾기 어렵지만,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대목이라 한번 따져 봅니다.
몸으로 이루는 성불
먼저 몸 그대로의 성불 문제입니다. 부처님 재세 시와 입멸 직후에는 이 부분을 두고 혼란스러워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2,500년 전쯤의 실존 인물입니다. 태어난 해를 두고는 논란이 많지만 여든에 입멸하셨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경전은 입멸 전 부처님이 몸이 몹시 피곤하니 눕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후대의 논사(論師)들은 이 인간적인 호소를 두고 의문을 품었습니다. 깨달음을 완성한 데 그치지 않고 몸 자체가 부처인 분이 피곤해서 눕고 싶다고 했으니 그것도 번뇌가 아니냐, 몸이 있는 한 완전한 열반은 없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이런 물음은 몸을 지닌 채 얻은 열반인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몸까지 떠나 생리적 번뇌마저 사라진 열반인 무여열반(無餘涅槃)의 구분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두 열반의 구분은 초기 경전에 이미 나옵니다. 유여열반은 무언가 남아 있는 열반이고, 무여열반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열반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몸이 곧 법이라는 의미의 법신을 실체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200년 사이에 걸쳐 완성된 대승의 대표 경전 『법화경』의 「제바달다품」은 여인의 몸으로 성불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전까지는 어느 경에서든 여자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고 못 박아 두었으니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경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용녀(龍女)가 삼천대천세계와 맞먹는 값의 보배 구슬을 부처님께 바치자 부처님이 곧 받으셨습니다. 용녀는 지적보살과 사리불에게 구슬을 바치고 세존께서 받으신 일이 빠르냐고 묻고, 매우 빠르다는 대답을 듣습니다. 그러자 용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의 신통한 힘으로 나의 성불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보다도 더 빠를 것입니다.
모인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녀는 잠깐 사이에 남자의 몸으로 변해 보살행을 갖추고, 남방의 무구(無垢)세계로 가서 보배 연꽃에 앉아 등정각을 이룹니다. 서른두 가지 훌륭한 몸매와 여든 가지 원만한 모습을 갖추고 시방의 모든 중생을 위해 미묘한 법을 설합니다.
정리하면 부처님 당시에는 몸 그대로의 성불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수백 년 뒤에는 육신 그대로의 성불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고 남녀의 구별까지 없애는 사상으로 나아갔습니다. 밀교는 『법화경』보다 적어도 500년쯤 뒤에 성립했으니 이 몸으로 부처를 이룬다는 생각이 밀교의 독창은 아닙니다. 그래도 『천수경』의 법성신은 『법화경』보다는 밀교의 영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법성이란 무엇인가
남은 물음은 법의 성품인 법성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다행히 의상(義湘, 625~702) 스님이 방대한 『화엄경』을 210자로 줄인 「법성게(法性偈)」가 있습니다. 첫머리가 법성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게송 전체가 법의 성품을 풀어낸 것이니 이보다 좋은 길잡이는 없습니다.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법의 성품은 둥글게 어우러져 두 모습이 없고, 모든 법은 움직임 없이 본래 고요합니다. 이름도 모양도 끊어진 자리여서 지혜로도 알기 어렵습니다. 참된 성품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인연을 따라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나 속에 모두가 있고 모두 속에 하나가 있으며, 한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고 낱낱의 티끌마다 또한 그렇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한 생각이고 한 생각이 곧 헤아릴 수 없는 시간입니다.
게송은 이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뒤섞이지 않는다고 하고, 처음 마음을 낼 때가 곧 깨달음이며 생사와 열반이 늘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이치와 현상이 나뉘지 않는 이 경계가 보현보살과 부처님의 경계입니다. 그 가운데서 중생을 위한 보배가 비처럼 쏟아져 허공을 채우고, 중생은 저마다 그릇만큼 이익을 얻습니다. 그러니 수행자는 본래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헛된 생각을 쉬어야 하며, 훌륭한 방편을 이정표 삼아 자기 마음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함없는 보배인 다라니로 온 법계를 법당으로 장엄하고 그 실제인 중도의 자리에 앉으면, 그것을 예로부터 부처라 불러 왔다고 게송은 끝을 맺습니다.
그래도 어렵게 느껴진다면 다른 번역을 나란히 놓고 읽어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가 1992년에 펴낸 팔만대장경 해제에 실린 우리말 법성게는 같은 대목을 이렇게 옮겼습니다.
하나 속에 온갖 것 있고 온갖 것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온갖 것이고 온갖 것이 하나라네
끝없는 시간이 하나의 순간이요
하나의 순간이 끝없는 시간이며
마지막 구절인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곧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아 움직임이 없는 이를 예로부터 부처라 한다는 대목이 법성신을 이룬 경지를 말합니다.
관세음보살께라도 의지해 법성신을 얻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은 누구에게나 같습니다. 법성이 도무지 감이 오지 않을 만큼 어렵다는 느낌도 누구나 마찬가지이니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천수경』은 관세음보살이 다 이루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천수경』을 받아 지니면[受持] 법의 몸인 법성신을 얻게 된다는데, 단어의 뜻을 조금 모른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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