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정취보살 마하살(南無 正趣菩薩 摩訶薩)
정취보살(正趣菩薩)도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다만 천수보살이나 관자재보살처럼 관세음보살과 같은 보살이라고 못 박기에는 따져 볼 점이 있습니다.
정취는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 번 세운 원을 향해 외길 수행으로 일관한다고 해서 무이행보살(無異行菩薩)이라고도 합니다. 정취보살은 『화엄경』의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쉰세 분의 선지식을 찾아갈 때 스물아홉 번째로 만나는 분입니다. 보살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느냐는 선재동자의 물음에 정취보살은 이렇게 답합니다.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이름하여 '보문속질행해탈(普門速疾行解脫)'이다.
여기 나오는 보문(普門)이라는 말, 그리고 중생 구제를 첫째 원으로 삼는다는 점이 관세음보살과 겹칩니다. 두 보살을 같은 분으로 보는 까닭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음 도량인 낙산사(671년 의상 창건)의 주법당 원통보전에는 관세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나란히 모셨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지금은 낙산사 하면 홍련암과 의상(義湘, 625~702)이 먼저 떠오르지만, 『삼국유사』의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조가 그 이야기입니다. 두 성인은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가리킵니다. 두 보살이 같은 분인지 다른 분인지 생각하며 읽어 볼 만합니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낙산의 두 성인
의상이 당나라에서 처음 돌아왔을 때,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바닷가 어느 굴속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낙산이라 불렀습니다. 서역에서 관세음보살이 머문다는 보타낙가산에서 이름을 빌린 것입니다. 의상이 이레 동안 재계한 뒤 새벽에 앉을 자리를 물 위에 띄우자, 불법을 지키는 용천팔부의 시종들이 그를 굴속으로 이끌었습니다. 공중을 향해 예를 올리자 수정 염주 한 꾸러미가 내려왔고, 동해의 용도 여의보주 한 알을 바쳤습니다. 다시 이레를 재계한 끝에 관음의 참모습을 뵈었는데, 관음은 자리 위쪽 산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솟을 터이니 그 땅에 불당을 지으라고 일렀습니다.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솟아 있었습니다. 의상은 그곳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모셨으며, 대나무가 곧 사라지자 그 자리가 관음 진신이 머무는 곳임을 알았습니다.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받은 두 구슬을 불당에 봉안한 뒤 떠났습니다.
뒤이어 원효가 예배하러 찾아왔습니다. 남쪽 들에 이르자 흰옷 입은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어서 장난삼아 벼를 달라 하니, 여인은 벼가 아직 여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다리 밑에서는 한 여인이 월경 때 입은 옷을 빨고 있었는데, 물을 청하자 그 더러운 물을 떠 주었습니다. 원효는 그 물을 쏟아 버리고 냇물을 새로 떠 마셨습니다. 그때 들 가운데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화상은 가지 말라고 외치고는 사라졌고, 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절에 이르러 보니 관음상 자리 밑에 그 신의 나머지 한 짝이 놓여 있었습니다. 원효는 그제야 길에서 만난 여인이 관음의 진신이었음을 알았고,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불렀습니다. 원효는 성굴에 들어가 관음의 참모습을 다시 뵈려 했지만 풍랑이 거세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 뒤 굴산조사 범일(梵日)이 태화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 개국사에 이르렀을 때, 왼쪽 귀가 없는 한 스님이 대중의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말을 건넸습니다. 자신도 같은 고향 사람이며 집이 명주 땅 익령현 덕기방에 있으니, 훗날 고향에 돌아가거든 꼭 자기 집을 지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범일은 승려들이 모인 총석(叢席)을 두루 다니다가 중국 항주 염관의 제안선사에게서 법을 얻었고, 회창(會昌) 7년 정묘년(847)에 돌아와 먼저 굴산사를 세우고 불교를 전했습니다.
당 선종 12년(858) 2월 보름날 밤, 꿈에 그 스님이 창밖에 나타나 개국사에서 한 약속을 어찌 이리 늦게 지키느냐고 물었습니다. 범일은 놀라 꿈에서 깨어 수십 명을 이끌고 익령 땅으로 그가 사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낙산 아랫마을에 덕기라는 여인이 살았는데, 여덟 살 난 아들이 마을 남쪽 돌다리 근처에서 놀다가 금빛 나는 아이와 함께 논다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범일이 그 다리 밑을 살피니 물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었고, 꺼내 보니 왼쪽 귀가 떨어져 나간 모습이 예전에 만난 스님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정취보살의 상입니다. 범일은 점치는 대쪽인 간자(簡子)를 만들어 절터를 점쳤고, 가장 좋다고 나온 낙산 위에 세 칸짜리 불당을 지어 그 상을 모셨습니다. 백여 년 뒤 들불이 산까지 번졌을 때 관음과 정취 두 성인을 모신 불당만 화를 면하고 나머지는 모두 타 버렸다고 합니다.
일연과 『삼국유사』
이 이야기를 실은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달리 정사(正史)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앞서도 『삼국유사』를 인용했으니 일연이 어떤 인물인지 간단히 짚어 둡니다. 조선 시대에 굳어진 비뚤어진 시각이 오늘까지 남아 일연을 요승(妖僧)이라고까지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행히 근래 들어 일연과 『삼국유사』를 다시 평가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일연은 고려 후기에 선풍(禪風)을 일으키고 왕에게까지 불법을 설했으며, 1283년에는 국존(國尊)으로 추대되어 원경충조(圓經沖照)라는 호를 받았습니다. 이(理)와 사(事)에 두루 막힘이 없었을 뿐 아니라 현실을 보는 감각과 안목도 뛰어났던 인물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사문(沙門)들은 그 시대 최고의 사상가였고, 현실을 읽는 감각도 남달랐으며, 실천에서도 본보기가 된 존경받는 집단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악습으로 남아 있는 인도의 계급제도(카스트)가 인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존재하지 않았던 곳이 부처님 생전의 승단입니다. 계급제도가 인도 현대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부처님과 제자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닌 개혁가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연 또한 이에 못지않은 시대의 선각자였습니다. 같은 부처님 제자이면서 오늘의 출가자들은 그런 사명감을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따르면 정취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나란히 모셔진, 서로 다른 보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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