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를 신통하고 묘한 힘이 있는 신비로운 말씀이라고 옮기기는 하지만, 그 말로 다 담기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더 나은 풀이가 마땅히 떠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다라니의 우리말 풀이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천수경』은 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위한 경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라니 자체가 관세음보살과 삼보를 찬탄하고 공경하며 귀의해 의지하는 내용으로 짜인 한 편의 경입니다. 그 앞뒤의 구절들은 중생으로서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실천하겠다는 다짐과 참회, 발원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신묘장구대다라니까지만 독송해도 되고, 다라니만 되풀이해도 그 자체로 훌륭한 수행이 됩니다.
뜻을 새기며 외우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비롯한 진언(眞言)이 본격적으로 우리말로 옮겨지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길게 잡아도 십 년 안팎입니다. 한때는 다라니나 진언의 뜻을 새기는 일 자체를 금기로 여겼습니다. 속된 말로 천기누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인도에서 공부하며 부처님 당시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주로 대승 경전에 쓰임)와 빨리어(주로 초기 불교 경전에 쓰임)를 익히고, 한역(漢譯)을 거치지 않고 경전을 바로 옮기는 이들이 생기면서 이제는 다라니와 진언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흐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직역한 것을 견주어 보니, 그동안 독송용 『천수경』에 적힌 다라니는 띄어쓰기조차 잘못된 곳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다'를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다'로 읽어 온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왕이면 띄어쓰기를 바로잡은 본문과 우리말 풀이를 곁에 두고 뜻을 새기며 독송하는 편이 좋습니다.
아소카 왕의 석주와 아람어
부처님 당시의 언어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대 언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덧붙입니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 전후까지 인도에서는 무척 많은 언어가 쓰였습니다.
불교가 세계로 퍼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소카 왕은 인도 대부분을 아우르는 제국을 다스렸고, 그 영토는 서북쪽으로 지금의 파키스탄을 지나 아프가니스탄 일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불교에서 전륜성왕으로까지 기리는 아소카 왕은 자신의 통치 영역을 표시하고 통치 원칙을 알리려고 많은 석주(石柱)와 비문을 세웠습니다. 서북쪽 변경,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등지에서 발견된 아소카 비문 가운데에는 아람어(Aramaic)로 새긴 것도 있습니다. 아람어는 예수 시대 예루살렘에서도 쓰던 말입니다. 몇백 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같은 언어권이었다는 사실은, 예수가 석가모니라는 인물과 그 사상을 알았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방증(傍證)이 됩니다.
19세기 말에는 라다크의 한 티베트 불교 사원에 이사(Issa)라는 성자의 행적을 적은 문서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는데(실물이 확인되지 않아 지어낸 이야기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슬람권에서는 예수를 흔히 이사라고 부릅니다. 신약성서에 빠져 있는 예수의 열세 살부터 스물아홉 살까지의 행적을 두고, 예수가 인도에서 공부했다는 설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교회가 이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니 궁금증은 더 커집니다.
외경이 그리는 젊은 예수
교회가 정식 복음서로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말씀을 기록한 문서들이 있는데, 이를 외경이라 합니다. 1947년 2월 사해 서안(西岸) 쿰란 지역의 동굴들에서 구약성서 사본과 유대교 관련 문서, 이른바 사해문서(Dead Sea Scrolls)가 발견된 뒤로 외경 연구가 활발해졌습니다. 사해문서는 2,000여 년 전에 쓰인 성경 사본과 주석서로, 기독교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도 귀중한 문헌입니다.
외경 가운데에는 네 복음서를 뒷받침하는 내용도 있지만, 지금의 굳어진 기독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서도 많습니다. 고대의 외경은 아니지만 1908년 미국에서 나온 『보병궁복음서(The Aquarian Gospel of Jesus the Christ)』도 젊은 예수의 구도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려 이런 논의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그 36장에 따르면, 티베트 라싸에는 구도자를 위한 사원이 있었고 수많은 고전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안에 담긴 비밀의 가르침을 직접 읽고 싶어 했습니다. 마침 동방 최고의 성자로 불리던 멘구스테가 그 사원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에모두스 고원을 넘는 길은 험했지만 예수는 길을 떠났고, 비댜빠지라는 이가 믿음직한 안내자 한 사람을 딸려 보내며 멘구스테에게 이 유대의 성자를 잘 맞아 달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며칠 뒤 사원에 이르자 멘구스테와 승려들, 스승들이 예수를 맞이했습니다. 예수는 멘구스테의 도움으로 성스러운 고대 필사본을 모두 읽었고, 두 사람은 다가올 시대와 그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알맞은 예식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라싸에서 예수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원 학교의 공부를 마친 뒤 서쪽으로 길을 떠나 여러 마을에 잠시씩 머물며 가르쳤습니다.
라다크의 레라는 마을에서는 수도승과 상인, 천민에게서 두루 환영을 받아 수도원에 머물며 가르치고 장터에서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근처에 어린 자식이 죽을병에 걸린 여인이 살았는데, 예수가 하느님이 보낸 스승이라는 말을 듣고 아이를 안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는 하늘을 우러러 아이에게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 달라고 기도한 뒤, 사람들 앞에서 아이 위에 손을 얹고 여인에게 당신의 믿음이 아들을 고쳤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나았고, 놀란 사람들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이렇게 열병을 꾸짖어 아이를 죽음에서 건질 수 없으니 이 사람은 하느님이 보낸 이가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많은 사람이 환자를 데려왔고 예수는 말씀으로 그들을 고쳤습니다. 며칠 동안 머물며 병을 치료하는 법과 죄를 씻어 내는 법,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드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이어 카슈미르 골짜기에서 라호르로 가는 상인 무리를 만났는데, 레에서 예수의 권능을 본 상인들이 무척 반가워하며 낙타 한 마리를 내주었습니다. 예수는 라호르를 거쳐 신드 강을 건너고 페르시아를 지나 더 서쪽으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라호르에서는 아자이닌과 몇몇 승려가 그를 맞았고, 예수는 그의 손님으로 머물며 병을 고치는 비법을 전하고, 공기와 불과 물과 흙의 영을 다스리는 법, 죄를 사하고 씻어 내는 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와 진언
이 밖에도 예수와 기독교 교리를 둘러싼 이론(異論)은 많고, 이보다 더 과감한 결론을 내놓는 신학 연구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진언과 관련된 주장이 하나 있습니다.
인도와 티베트 등지에서 예수에게 심령 치료의 비법을 전한 밀교 계통의 스승들은 의술과 비술을 남을 위해 쓰되 함부로 쓰지 말라고 일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간 예수는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 무리 앞에서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신성이 있다고 외쳤고, 여러 이적을 보이며 군중을 모아 신의 사랑과 평등을 전했습니다. 결국 유대교 성직자들의 시기와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제자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한 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Eli Eli Lama Sabachthani)', 곧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고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말이 티베트 라마 불교에서 '엘리엘리 라마 삼먁 삼보리(Eli Eli Lama Sammach San Bori)'라는 다라니로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는 판단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이 분야에 평생을 바친 연구자들이 그 결과를 여러 권의 책으로 펴내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기독교를 날카롭게 비판한 책이 여럿 있지만, 기독교를 완전히 다시 짜야 할 정도의 내용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종교는 한번 사상이 굳어지면 나중에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도 신앙에 대한 도전으로 몰려 바로잡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종교 비판서는 나름의 의미가 큽니다. 충분히 연구해 자신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것이 종교 비판이니, 불교를 비판하는 책도 많이 나오는 편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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