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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
아금지송묘진언(我今持誦妙眞言)
원사자비밀가호(願賜慈悲密加護)

 

사방찬에 이어지는 도량찬(道場讚)의 네 구절입니다. 도량이 맑아 티끌 하나 없으니, 삼보와 천룡께서 이 땅에 내려오소서. 제가 이제 미묘한 진언을 지니고 외우오니, 자비를 베푸시어 은밀히 보살펴 주소서.

어디까지가 도량인가

도량(道場)은 수행하는 성스러운 곳을 말하며, 이 뜻일 때는 도장이 아니라 도량으로 읽습니다. 절이 대표적인 도량입니다.

도량은 보통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천수경』의 앞뒤 맥락을 보면 도량찬의 도량은 『천수경』을 독송하는 사람의 마음, 불법을 찬탄하고 발원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마음의 밭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습니다. 법당만 수행 공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주변 형편이 어떻든 내 마음의 본래 성품인 불성(佛性)을 되찾는 것이 불법의 근본입니다. 절에 가면 정신이 좀 들다가 집에 돌아오면 바로 망상과 집착에 빠져 부처님 생각이 사라진다면, 불교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반드시 법당에서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어디까지가 법당이냐고 물어볼 일입니다.

도량청정무하예는 도량이 맑고 깨끗하여 더러움이 조금도 없다는 구절입니다.

하늘과 용, 천룡

삼보천룡강차지의 삼보는 불·법·승입니다. 천룡(天龍)은 하늘의 신들[天]과 용(龍)을 함께 이르는 말로, 불법을 지키는 팔부중(八部衆) 가운데 맨 앞의 둘입니다. 옛이야기나 영화에서나 보던 용이 불법을 옹호하는 신의 자리를 얻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동양과 달리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양에서 용은 천사 미카엘이 물리쳐야 할 악의 상징이며, 사탄과 거의 같은 존재로 여겨집니다. 동양의 용은 본래 바다에 삽니다. 그러다 하늘로 오르면 더 이상 짐승이 아니라 악에 맞서 사람을 지키는 선신(善神)이 됩니다. 바다의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용오름이라 하는데, 실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토네이도에 가깝습니다. 때를 놓치거나 힘이 모자라 하늘에 오르지 못한 용을 이무기라고 부릅니다.

『천수경』의 천룡은 불법을 지키는 하늘의 신들과 용들이 내가 불법을 받드는 도량을 지키려고 이 땅에 내려오는 것입니다. 용은 거의 모든 경전 끝에 불법을 옹호하고 불법에 귀의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법화경』의 마지막 대목도 그렇습니다.

부처님이 이 경을 설하실 때, 보현 등 여러 보살과, 사리불 등 여러 성문과, 하늘과 용과 사람과 사람 아닌 이 등 모든 대중이 모두 크게 환희하여 부처님 말씀을 받아 지니고 예배하고 물러갔다.

 

삼보천룡강차지는 삼보와 천룡께서 내려오시어 이 자리를 지켜 달라는 청입니다.

미묘한 진언과 진언 만능주의

진언은 밀교의 수행법입니다. 고려대장경에 실린 경들을 보면 진언이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런 진언이 정말 미묘하고 신통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해 줄 수 있느냐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밀교 수행자들은 의심 자체를 반박하겠지만, 독충(毒蟲)에 물렸을 때 이 진언을 외우면 된다는 경전 구절을 그대로 믿으라는 것과 다르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진언 수행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진언이 수행의 모든 일을 해결해 준다는 생각은 큰일 날 '불법(不法)'입니다.

예불과 불공, 시식 같은 의식을 정리한 『석문의범』을 보면, 불공이나 제사 같은 모든 의식에 빠지지 않는 진언이 있습니다. 보궐(補闕)진언입니다. 독경이나 염불을 하다가 모르고 빠뜨린 부분을 이 진언이 다 채워 준다고 해서 이름도 보궐진언입니다. 진언 만능주의를 극단으로 밀고 가면, 『천수경』을 독송할 때 정구업진언 다음에 바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고 이어서 보궐진언 '옴 호로호로 사야모께 사바하'를 세 번 하면 끝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진언을 둘러싸고 더 심각한 문제도 있습니다. 현대 한국 선불교의 한 큰스님을 뵈려면 먼저 삼천배를 해야 했습니다. 법문을 듣기 전에 속된 마음을 미리 비우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삼천배를 하고 나면 어떤 가르침이든 마음에 깊이 박힙니다. 얼마나 고생해서 들은 말씀인데 하며 스스로 잊지 않으려 다짐하는 것이 중생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큰스님은 선(禪) 수행에 앞서 『능엄경』의 능엄신주를 외우는 주력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화두로 번뇌를 다스리고 화두를 타파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는 간화선, 그것도 돈오돈수만을 바른 법이라고 단언한 수행관과, 진언 수행인 능엄신주를 필수로 삼은 수행관을 한꺼번에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난감합니다.

근래에는 그 후학들이 삼천배와 법신진언, 능엄신주 주력(呪力)을 한데 묶어 아비라기도라는 이름으로 그 큰스님이 세운 최고의 수행법이라며 권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르침을 지나치게 부풀려 해석해 오히려 큰 누를 끼치는 일입니다. 아비라기도의 아비라는 법신진언 '나무 사만다 붓다남 아 비 라 훔 캄 스바하(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아 비 라 훔 캄, 성취하게 하소서)'에서 따온 말입니다.

『천수경』의 아금지송묘진언은 이런 개념과 거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묘진언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가리키고, 구절 전체는 그 다라니를 이제 외웠다는 고백입니다.

가호와 가피

원사자비밀가호의 가호(加護)는 전형적인 종교 언어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말끝에 붙이는 'God bless you'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불교에서는 가호보다 가피(加被)라는 말을 더 흔히 씁니다. 불공 축원을 할 때도 불보살의 가피가 있기를 빕니다.

우리나라의 종교 용어는 대부분 불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배, 장로, 가호처럼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우쭐해한다면 유치한 일입니다. 1,6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불교의 말을 다른 종교가 몇 가지 빌려 쓰거나 고쳐 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자비를 베푸시어 은밀히 보살펴 달라는 이 구절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이미 독송했으니 이제 가피를 내려 달라는 청으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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