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은 성인의 조건, 또는 성인이 이른 경지를 노래한 구절들을 모은 것입니다. 여기서 성인은 수행자, 깨달음에 이른 사람, 혹은 붓다를 염두에 둔 말로 보면 됩니다.
친한 데서 두려움이 생기고, 거처가 있으므로 더러운 먼지가 낀다. 친함도 없고 거처도 없다면, 이것이 바로 성인의 통찰이다.
경은 이어서 성인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립니다. 이미 돋아난 번뇌의 싹을 잘라 내고, 새로 심지 않으며, 지금 생긴 번뇌를 키우지 않는 사람, 홀로 가는 그 사람을 성인이라 부릅니다. 번뇌가 일어나는 근본을 살펴 원인을 헤아리고 거기 집착하는 마음을 키우지 않는 사람은 생멸을 넘어선 경지를 본 성인이며, 망상을 버렸으므로 헤매는 무리에 끼지 않습니다.
모든 집착의 원인을 알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탐욕을 떠난 성인은 무엇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적멸의 저 언덕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알며, 지극히 지혜로워 물질에 더럽혀지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집착을 끊어 해탈한 사람을 현명한 이들은 성인으로 압니다.
지혜의 힘이 있고 계행과 덕행을 잘 지키며, 마음이 잘 모여 있고 명상을 즐기며, 집착을 벗어나 거칠지 않고 번뇌에 물들지 않는 사람도 성인입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 현명한 사람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홀로 걸으며 게으르지 않고,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절제해 악을 행하지 않고, 젊을 때나 중년이 되어서나 자신을 다스리며, 남을 괴롭히지도 남에게 괴롭힘을 받지도 않습니다. 성적인 접촉을 끊고 어떤 젊은 여인에게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며, 교만하지도 게으르지도 않아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세상을 잘 알고 궁극의 진리를 보며, 거센 물결과 바다를 건너고 속박을 끊어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사람입니다.
경은 출가자와 가정을 꾸린 수행자의 차이도 말합니다. 가족을 부양하는 이는 짐승의 목숨을 해치게 되고 절제하기 어렵지만, 성인은 스스로 삼가며 늘 남의 목숨을 지킵니다. 목이 푸른 공작이 하늘을 날아도 백조의 빠르기를 따르지 못하듯, 집에 있는 사람은 세속을 떠나 숲에서 명상하는 수행자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싱겁게 느껴진다면
깨달음이란 어떤 경지이고 그 경지에 이른 사람의 마음은 어떠할까 하는 궁금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위의 구절들은 붓다 당시와 입멸 후의 수행자들이 외워 전한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너무 싱겁다, 뭔가 더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갈증이 든다면 『숫타니파타』를 끝까지 읽으면 풀립니다. 하지만 십중팔구는 몇 번을 읽어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경의 내용이 빈약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2,500년 전 사람들은 이것으로 성인의 자리에 올랐는데, 지금 사람들은 "그걸 누가 모르나" 하거나 "깊이가 없다"며 넘겨 버립니다. 2,000년이 넘는 시간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붓다의 당연한 말씀만으로 깨달음에 다가가기에는 너무 많은 욕심과 집착에 길들어 있습니다. 욕심을 누르기에는 갖고 싶은 물건이 너무 많고, 더 안타깝게도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건마저 너무 많아졌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면 상대가 오히려 불쾌해하거나 내 진심을 비틀어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이 시대에 태어난 업(業)으로 받아들이고, 모두 내 마음을 단련하는 수행의 재료로 여겨야 합니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깨달음을 신비화하고, 심지어 사람의 의지와 인식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것으로 몰아가는 일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역사 속에 실제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신이 아니며, 세상일을 주재하거나 간섭하는 존재는 더욱 아닙니다. 붓다라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의 의미는, 나도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 주었고, 누구나 자신처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며 그것이 사람으로서 가장 높은 가치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어떤 명분을 대도 불교라 할 수 없고, 불법(佛法)이라 부를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역대의 어느 조사나 선사가 그랬다, 깨달았다는 어느 승려가 그랬다, 세상이 다 아는 누구의 말이다 하며 아무리 우겨도, 붓다가 그렇게 말하고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것을 불교로 믿고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숫타니파타』가 거듭 말하는 어리석음은 진리를 외면하는 것이지만, 붓다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불교라며 붙드는 것은 더 큰 어리석음입니다. 빈 땅에 새 집을 짓는 일보다 헌 집을 헐고 다시 짓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경집이라는 형식
『숫타니파타』는 여러 편의 작은 경을 모은 것으로, 이런 형태를 경집(經集)이라 합니다. 다섯 품 가운데 첫 품인 '뱀의 품'은 이 경으로 끝나는데, 여기 실린 열두 편은 각각 독립된 경입니다.
경은 대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숫타니파타』의 경들은 몇 편만 그렇게 시작하고, 일부는 서술로 되어 있으며, 대부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詩) 또는 게송(偈頌)의 형식입니다. 초기 경전 가운데서도 오래된 층에 속해, 붓다 입멸 후 제자들이 가르침을 외워 입으로 전하던 시의 형태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경 하나를 한 장(章)으로, 게송 하나를 한 구절로 나누어 읽으면 이 경전의 짜임을 따라가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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