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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붓다는 알라비 나라에 있는 알라바카 야차의 거처에 머물렀습니다. 야차는 붓다에게 다가와 "수행자여, 나가 주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붓다는 "좋다, 친구여" 하고 나갔습니다. 야차가 다시 "들어오시오" 하자 붓다는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세 차례를 되풀이한 뒤 네 번째로 나가라고 하자 붓다는 더는 나가지 않겠으니 할 일이 있으면 하라고 답했습니다.

야차는 그러면 묻겠으니 대답하지 못하면 마음을 어지럽히고 심장을 찢은 뒤 두 다리를 잡아 갠지스 강 너머로 던져 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붓다는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으라고 합니다. 야차는 시로써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으뜸가는 재산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잘 추구해야 안락을 가져 옵니까? 참으로 맛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입니까?

 

야차는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이고, 스스로도 얼마간의 신통력과 명예를 갖추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질문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좋은 재산, 가장 좋은 맛, 가장 좋은 삶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날카롭습니다.

지금의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은 탓에 붓다의 가르침을 종파(宗派)로 나누었고, 깨달음에 다가가는 방식도 도교(道敎)에 가깝거나 지나치게 어렵고 관념적으로 흐른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비록 야차의 질문이지만 이런 현실적인 물음에 대한 답이야말로 붓다 가르침의 정수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야차가 그렇게 당당했던 까닭

그런데 배우려는 쪽이 왜 붓다에게 나가라, 들어오라를 네 번씩이나 시킨 뒤에 물었을까요. 앞 경의 두 야차와 달리 붓다 앞에서 이토록 당당했던 배경이 궁금해집니다.

이에 대해서는 붓다고사(Buddhaghosa, 5세기)가 『숫타니파타』에 붙인 주석서 『파라맛타조티카(Paramatthajotika)』에 설명이 있습니다. 붓다고사는 중관 사상의 용수(2~3세기), 유식 사상의 세친(4~5세기)과 더불어 손꼽히는 불교의 논사(論師)입니다. 요점은 이렇습니다.

알라비 나라의 왕이 알라바카 야차에게 붙잡혔다가, 앞으로 12년 동안 날마다 사람 하나씩을 제물로 바치기로 약속하고 풀려났습니다. 문제는 이 야차가 사람을 잡아먹는 야차였다는 것입니다. 제물로 바쳐진 사람은 그대로 야차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날마다 산 사람을 구해 바치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어렵고 괴로운 일이었고, 결국 왕은 자기 아들마저 제물로 내놓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천안(天眼)으로 이 일을 안 붓다는 신통력으로 알라바카 앞에 나타났습니다. 알라바카는 문답을 벌여 붓다가 바른 답을 내면 다시는 사람을 잡아먹지 않겠다는 조건을 겁니다.

그러면 그 날카로운 질문은 야차가 직접 만든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야차의 부모가 과거불인 카사파 붓다에게서 이 문답을 배워 어린 야차에게 가르쳐 주었고, 야차는 이를 금판에 적어 간직해 두었습니다. 야차는 붓다의 대답을 그 적어 둔 답과 맞추어 볼 준비를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물론 붓다는 정답을 냅니다.

이런 이야기 방식은 붓다의 전생 수행담을 전하는 자타카(Jataka)와 함께 초기 경전에서 가르침을 전하는 정형화된 방법의 하나입니다. 『숫타니파타』는 이런 표현 방식의 원조라 할 만한 경전입니다.

붓다의 대답

세상 사람에게 믿음이 으뜸가는 재산이고, 가르침을 추구하면 안락을 얻게 된다. 진실이 맛 중의 최상이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이다.

 

야차는 다시 사람이 어떻게 거센 흐름과 바다를 건너고, 어떻게 고통을 넘어서며, 어떻게 완전히 맑아지느냐고 묻습니다. 붓다는 믿음으로 거센 물결을 건너고, 부지런함으로 바다를 건너며, 정진으로 괴로움을 벗어나고, 지혜로 청정함을 얻는다고 답합니다.

또 어떻게 지혜와 재물과 명성을 얻고 벗을 사귀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갈 때 걱정이 없느냐고 묻자, 붓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자들이 깨달음을 얻은 가르침을 믿고 부지런히 구하면 지혜를 얻습니다. 알맞은 일을 하고 책임감 있게 애쓰면 재물을 얻습니다. 진실함으로 명성을 얻고, 잘 베풀어 벗을 사귑니다. 믿음을 지니고 집에서 사는 사람에게 진실, 자제, 인내, 보시의 네 가지 덕이 있으면 저 세상에 가서도 걱정이 없습니다. 이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널리 물어보라고까지 합니다.

야차는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물을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며, 오늘 크게 이로운 것을 깨달았고 붓다가 알라비에 온 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합니다. 보시가 왜 큰 과보를 낳는지도 알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이와 그 가르침에 예경하며 마을에서 마을로, 산에서 산으로 다니겠다고 다짐합니다.

야차의 부모가 자식 교육에 쓸 만한 가르침이고, 사람을 잡아먹던 알라바카가 잘못을 뉘우치고 귀의할 만한 내용입니다. 정진으로 지혜를 얻고, 책임감과 노력으로 재물을 모으며, 진실함으로 이름을 얻고, 베풂으로 벗을 사귀라는 가르침은 오래 새겨 둘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많은 고통도 이 간단한 것을 실천하지 못해 받는 과보입니다. 인종과 종교와 문화를 가리지 않고, 사람이 기본으로 삼아야 할 가치가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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