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을 읽을 때는 그 말이 쓰인 시대와 지역을 함께 떠올려야 합니다. 숫타니파타는 학자들 사이에서 대체로 붓다 입멸 직후부터 길게 잡아 입멸 후 200년 무렵 사이에 이루어진 경으로 봅니다. 지금 전하는 숫타니파타는 다른 초기경전과 같이 빠알리어로 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다른 경전보다 오래된 말의 형태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숫타니파타에는 잘 정리된 아함부 경전에 흔히 보이는 용어조차 잘 나오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쓰는 낱말로, 마주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건네듯 가르침을 전합니다. 12연기, 6도 윤회, 6바라밀을 빼고 나면 할 말이 별로 남지 않는 오늘의 불교가 얼마나 번잡해졌는지, 이 소박한 경이 거꾸로 보여 줍니다.
이제 읽을 제2품 소품(小品)도 짧고 간결합니다. 소품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특별한 술어 없이도 붓다의 숨결이 생생히 느껴지는 대목들이어서, 지금껏 익혀 온 불교와 느낌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경의 내용이 밋밋하다고 가볍게 여기면 주객이 뒤바뀐 것이니, 오히려 익숙했던 쪽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유럽, 특히 프랑스나 독일에서 불자라는 자부심으로 卍자 모양 목걸이나 반지를 하고 다니다가 신나치주의자로 오해받아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앞에 두고도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큰 낭패입니다.
보배의 노래
소품 첫 장의 제목인 보배는 깨달음을 이룬 붓다, 또는 붓다의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내용은 단순해도 구절 하나하나가 가볍지 않습니다. 깨달은 붓다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당시 사람들은 붓다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짐작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구절은 「이러한 진실로 인해 모두 행복하라」로 끝납니다. 여기서 진실이란 붓다가 분명히 깨달음을 얻었다는 확고한 사실입니다. 모두 행복하라는 말에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며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라고 축복하는 붓다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여, 땅에 사는 것이든 공중에 사는 것이든 다들 기뻐하라.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내 말을 들으라.
경은 이어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밤낮으로 보시를 올리는 사람들을 자비로 대하고 함부로 하지 말며 지켜 주라고 당부합니다. 그러고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어떤 재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도 완전한 사람인 여래에게는 견줄 수 없으며 최고의 보배는 깨달음을 얻은 이 안에 있다고 노래합니다.
석가족의 성자가 도달한 번뇌의 소멸, 미묘한 이치, 생사를 초월한 것, 이 사실과 견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최고의 보배는 이 깨달은 성자에게 있다. 이러한 진실로 인해 모두 행복하라.
그다음 구절들은 보배가 깃든 자리를 차례로 짚어 갑니다. 붓다가 찬탄한 청정한 마음의 안정, 사람들이 최상의 마음의 안정이라고 부르는 그것과 대등한 것은 없으니 최고의 보배는 그 진리 속에 있습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감각적 욕망을 떠나 고타마의 가르침대로 집착 없이 지내며, 수행을 완성해 적멸을 즐기는 이들이 있으니 최고의 보배는 수행자의 무리 안에도 있습니다.
깊은 지혜를 가진 붓다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에 빠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여덟 번째 생존을 받지 않는다. 최고의 보배는 수행자의 무리 안에 있다. 이러한 진실로 인해 모두 행복하라.
경은 또 궁극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은 작은 허물조차 감추지 못한다고 합니다. 붓다가 열반으로 이끄는 미묘한 법을 가르친 일은 초여름 더위에 숲속 가지마다 꽃이 피어나는 모습에 비유됩니다. 위없는 것을 알고, 위없는 것을 주고, 위없는 것을 가져오는 위없는 붓다가 으뜸가는 법을 설했다는 구절이 뒤를 잇습니다.
지나간 업은 이미 소멸했고, 새로운 업은 생기지 않는다. 그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없애고 그 성장을 원치 않는 깨달은 이들은 등불처럼 꺼져 열반에 든다.
장의 마지막에서는 땅과 하늘의 존재들에게 신과 인간이 섬기는 완성된 눈 뜬 이를, 완성된 진리를, 완성된 무리를 예배하자고 세 번 노래합니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가 이 무렵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업과 윤회, 그리고 연기
이 장이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업과 윤회를 가리키는 말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숫타니파타가 입으로 전해지던 때에 업을 뜻하는 카르만(Karman, 흔히 Karma라고 쓰지만 Karman 쪽이 더 정확합니다)과 윤회를 뜻하는 삼사라(Samsāra)라는 말을 실제로 썼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과, 그러니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는 대로가 옳다는 판단은 따로 놓고 따져야 합니다.
숫타니파타를 꼼꼼히 읽는 까닭도 될 수 있는 한 붓다 곁으로 다가가 오늘의 불교를 다시 비춰 보려는 데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불교는 붓다의 불교이기는커녕, 붓다가 크게 꾸짖었던 바라문의 불교, 외도(外道)의 불교에 가깝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업과 윤회는 붓다 이전, 베다 시대를 거쳐 초기 우파니샤드에 이르는 동안 이미 개념이 자리 잡은 일반 용어였습니다. 업은 기본적으로 어떤 결과를 안에 품고 있는 행위, 행동, 작용으로 여겨졌습니다. 윤회는 업이 원인이 되어 나고 죽기를 되풀이하는 일로 이해되었습니다. 둘 다 고대 인도에서는 흔한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붓다는 무엇을 깨달았기에 오히려 이 두 가지에 매달리던 사람들을 그토록 꾸짖고, 바른 가르침이 아니라고 강조했을까요. 업과 윤회를 넘어서는 무엇을 가르쳤기에 당대의 쟁쟁한 수행자들이 붓다와 논쟁하다가 굴복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 무엇은 연기(緣起)였습니다. 세계를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보는 길입니다. 그러니 업과 윤회도 연기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일어나고 설명되어야 하며, 그것도 12연기가 아닌 그냥 연기여야 합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깊이 새겨야 할 화두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한국 불교의 상당 부분은 붓다 이전의 업과 윤회 관념으로 신도를 끌어모으고, 신도들은 고단한 깨달음의 길보다 내 바람을 빨리, 손쉽게 이루려는 마음으로 불교를 믿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아무 대안도 없이 지식을 깨달음의 장애로 몰아붙이는 선(禪)의 병폐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지성과 통찰력을 믿는다면, 선은 물론이고 지식을 포함한 모든 사상과 존재가 연기 안에 있다는 점을 밝혀 보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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