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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숫타니파타 소품의 셋째 장은 따로 풀이할 필요가 없을 만큼 짧고 뜻이 분명합니다. 다만 부끄러움을 말하면서 주로 친구 사이의 일만 다룬 점은 아쉽습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또 싫어해서, '나는 당신의 친구다'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친구에게 도와주지 않는 사람, 그는 내 친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경은 이어서 친구가 아닌 사람과 참된 친구를 가려 보입니다. 친구에게 실천은 없이 말만 앞세우는 사람을 현명한 이는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알아봅니다. 우정이 깨질까 걱정하며 아첨하면서도 벗의 허물만 보는 사람은 친구가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 품에 안기듯 의지할 수 있고, 다른 사람 때문에 사이가 멀어지지 않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좋은 결과를 바라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마땅한 책임을 지고, 기쁨을 낳고 칭찬을 받으며 안락을 가져올 원인을 닦습니다. 홀로 떠남의 맛과 고요함의 맛을 알고 진리에서 기쁨을 얻는 사람은 고뇌를 떠나 악을 멀리합니다.

위없는 행복

넷째 장은 제1품 뱀의 장(蛇品)의 여섯째 장인 파멸과 같은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붓다가 급고독원에 머물 때 한밤중에 하늘 사람(神)이 찾아와 묻는데, 이번에 묻는 것은 위없는 행복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으며, 현명한 사람과 가깝게 지내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존경할 것,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하라는 말이 놀랍습니다.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는 물음에는 늘 비슷한 이름들이 대답으로 돌아오지만, 이 구절은 누구를 존경하느냐보다 존경할 만한지를 가려보는 눈을 먼저 묻습니다. 정해진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입니다.

경전을 읽을 때도 같은 태도가 필요합니다. 경전은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업과 윤회에 대한 붓다의 참뜻은 무엇이었을까. 붓다에게 정치적 견해는 없었을까. 붓다 이후의 분열은 왜 시작됐고, 부파불교의 문제는 무엇일까. 붓다는 극락정토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었을까. 천태 사상 같은 것이 불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경전의 편찬도 역사 기록처럼 진실과 거리가 있는 다수나 승자의 논리로 쓰인 부분은 없을까. 전생을 인정한다면 복제 동물에게도 전생의 업이 있을까. 물질이 먼저일까, 정신이 먼저일까. 불교는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물음은 끝이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번뇌일 뿐 깨달음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전과 조사의 말씀에까지 의문을 품고 답을 밝혀 가려는 것은 불가지론(不可知論)과 다릅니다. 그 물음들의 맨 꼭대기에는 깨달음의 실체가 있습니다. 끝없는 왜가 중생이던 고타마를 붓다로 만들었고, 오늘의 지성인들도 불교를 향해 이런 질문을 쌓아 가고 있습니다.

경은 이어서 위없는 행복을 하나씩 꼽아 갑니다. 분수에 맞는 곳에 살며 일찍이 공덕을 쌓고 스스로 바른 서원을 세우는 것. 많이 배우고 기술을 익혀 그것을 바탕으로 뜻 깊은 말을 나누는 것. 부모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며 일에 질서가 있어 어지럽지 않은 것. 남에게 베풀고 이치에 맞게 행동하며, 친척을 아끼고 보호하고,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는 것. 악을 싫어해 멀리하고 술을 절제하며 착하고 건전하게 사는 것.

존경과 겸손, 만족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진지하게 듣는 것, 참을성 있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 진리를 논하는 것, 감각을 잘 다스려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참구해 열반에 이르는 것도 위없는 행복입니다.

힘든 세상 일이 닥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과 티가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가르침을 따르면 어떤 일이 닥쳐도 실패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나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위없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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