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없는 겁 동안 수행이 만족하사
보리수 밑에서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중생 제도하시려고 몸을 나타내사
구름처럼 오는 세상을 가득히 채우셨네
『화엄경』 여래현상품에서 보살의 위신력으로 구름 가운데서 울려 나오는 게송입니다.
성불은 우주적 사건
『화엄경』은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최고의 경전이지만, 뜻밖에도 부처님이 직접 설하는 경이 아닙니다. 이 경을 설하는 주인공은 대부분 보살이고,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들이 조연을 맡기도 합니다. 보살들이 삼매에 들어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려 설하는 형식입니다. 게송마다 누구의 게송인지를 밝혀 두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위의 게송처럼 몇몇 게송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 곧 존재 자체가 주인공이 됩니다. 『화엄경』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 『화엄경』의 세계는 부처와 중생, 부처와 보살, 부처와 세상, 부처와 물질이 하나로 어우러져 마침내 존재 자체가 부처님이 되는 세계입니다. 온갖 꽃이 이리저리 얽히고 어우러져 어느 하나 쓸모없거나 버릴 것 없이 조화를 이루는 장엄의 세계입니다.
경은 이 장엄한 세계를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지, 그 과정과 단계는 어떠한지를 수행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명쾌하고 단호하게 설명합니다. 인류가 이룬 가장 높은 삶의 지침서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게송에 처음으로 수행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수행은 어리석고 평범한 중생이 부처를 이루는 방법이고, 그 방법을 말하는 것이 경전이며 논서이며 조사어록입니다. 이 게송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수행에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 든다는 점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건지기 위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한량없는 겁 동안 수행했다고 했습니다.
『대지도론』(『대품반야경』의 주석서)은 겁(劫)이라는 시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방 1유순(유순은 넓이가 아니라 거리의 단위로, 한 유순을 대략 7~15km로 본다)이 되는 성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백 년에 한 알씩 꺼내어, 그 겨자씨가 다 없어지는 시간보다도 더 긴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1겁을 약 43억 2천만 년으로 환산하는 말도 흔히 쓰이지만, 이것은 힌두교 우주론에서 말하는 겁(브라흐마의 하루)의 길이입니다. 불교에서는 겁을 다시 소겁, 중겁, 대겁으로 나누어 말하기도 하니, 한량없는 겁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근래에 마치 부처의 경지에 오른 듯 말하는 이들이 얼마나 허황한지 경계해야 합니다. 성불은 한 개인의 일로 그치지 않는 우주적 사건입니다.
우주 법계에서 인간 중생의 자리
부처님이 옛적에 여러 갈래에 왕래하사
여러 중생들을 교화하고 성숙하게 하니
신통이 자재하고 한량없어서
일념에 모두 다 해탈하게 하네
같은 품에서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광명이 설하는 게송입니다. 이번에도 주인공은 광명, 곧 자연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의 중생만이 아니라 여러 갈래를 오가며 여러 중생을 구제한다고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그 여러 갈래와 여러 중생을 어떻게 나눌까요.
인도 땅(정확히는 지금의 네팔)에서 태어나 성불한 역사적 인물 석가모니불 앞에는 흔히 삼계도사 사생자부라는 말이 붙습니다.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를 이끄는 스승이자 사생(四生), 곧 태(胎)·란(卵)·습(濕)·화(化)로 태어나는 모든 생명의 자비로운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사생은 생명이 태어나는 방식을 네 가지로 나눈 것일 뿐이지만 삼계는 조금 복잡합니다.
우리 인간이 사는 곳은 욕계 가운데 수미산 남쪽 바다에 있는 남섬부주입니다. 절에 오래 다닌 분이라면 스님이 축원할 때 사바세계 남섬부주 대한민국 아무개 하던 소리를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잘났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이 불교적 세계관에서 보면 삼계 가운데 가장 낮은 욕계, 그것도 하늘 세계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욕계는 말 그대로 온갖 욕심으로 가득 찬 세계입니다. 불법을 구하겠다는 생각마저 욕심으로 여겨져 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욕계의 하늘 가운데 사대왕천과 도리천은 수미산에 의지해 있다 하여 지거천(地居天)이라 하고, 그 위의 하늘은 허공에 있다 하여 공거천(空居天)이라 합니다. 지거천은 인간 세계 위에 있는 하늘 세계이므로 지구를 가리키는 말로 볼 수는 없습니다.
범위를 다시 좁히면, 사대왕천 가운데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이 맡은 남섬부주가 우리가 사는 곳입니다. 욕계 위의 색계는 욕심은 벗어났지만 아직 물질을 여의지 못해 몸이 물질에 매여 있는 세계이고, 그 위의 무색계는 물질까지 여의고 정신으로만 존재하는 천계(天界)입니다. 윤회 속에 있는 이 삼계가 게송이 말하는 여러 갈래, 여러 중생입니다.
부처님은 이들을 신통으로, 그것도 일념, 곧 한 생각으로 해탈하게 한다니 참으로 신통한 말씀입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이 다행스럽고 든든해지는 대목이지만 걱정도 하나 남습니다. 부처님의 그 신통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꼭 있을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불교를 믿지 않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넘겨짚지는 않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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