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몸 항상 나타내사 법계에 다 충만하시며
광대한 음성 늘 연설하사 시방 국토에 널리 떨치시네
법희혜 보살이 부른 게송입니다. 이 구절을 읽기 전에 종교마다 공간으로서의 세계를 어떻게 그리는지 잠깐 살펴보면 흥미롭습니다.
창세기를 비롯한 성서의 우주관은 현대 과학의 눈으로 따져 보면 그리 유리한 처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짚어 종교의 우열을 가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에 창조주라는 범주가 있듯이 불교에도 그에 견줄 만한 세계의 범주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유일신이 넓은 우주 가운데 오직 지구에만 사람을 지어 두었다고 봅니다. 20세기의 이름난 물리학자 한 사람은 1926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로, 확률로 설명되는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7년 불확정성 원리가 발표되고 양자역학이 자리를 잡아 가면서 그의 자존심은 크게 꺾였고, 신의 뜻이라는 생각도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종교의 개념을 인간의 틀 안에 가두려는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말하는 과학자도 있습니다. 빅뱅 이후 백수십억 년 동안 팽창해 끝없이 넓어진 우주에서 티끌만 한 지구에만 생명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주의 엄청난 비효율이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객관적으로 다룬 시도로는 1961년에 발표된 한 방정식이 꼽힙니다. 우리 은하 안에 교신이 가능한 지적 문명이 몇이나 있을지를 여러 값의 곱으로 어림하는 식입니다. 곱하는 값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명이 생기기에 알맞은 별이 은하에서 태어나는 비율, 그 별이 행성을 거느릴 확률, 한 항성계 안에서 생명이 살 수 있는 행성의 수, 그런 행성에서 실제로 생명이 생겨날 확률, 그 생명이 지적 문명으로 나아갈 확률, 그 문명이 다른 별에 자기 존재를 알릴 통신 기술을 갖출 확률, 그리고 그런 문명이 이어지는 햇수입니다.
계산 결과가 1 이상이면 지구 밖에도 고등 생명이 있다는 근거가 됩니다. 다만 지금의 기술로는 항목마다 변수가 너무 커서 답을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법계가 곧 부처님의 몸
불교에서 법계(法界)는 불법이 미치는 세계, 곧 우주 전체를 가리킵니다. 게송은 부처님의 몸이 이 법계에 가득하다고 했으니 법계가 바로 부처님의 몸이 됩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땅에 태어나 열반에 드신 분인데 어떻게 그 몸이 우주에 가득하다는 것일까요.
근본 불교, 곧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살아 있던 시기의 불교로는 이 말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부처님조차 아라한 가운데 한 분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아라한은 소승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높은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대승 불교 사상이 자리를 잡으면서 부처님에 대한 이해도 훨씬 넓고 섬세해졌습니다. 대승 불교는 기원 전후에 일어난 새로운 흐름으로, 이전의 불교를 자기 해탈만 구하는 불교라고 비판하며 자기 이익보다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앞세웠습니다. 소승(작은 수레)이라는 말 자체가 대승(큰 수레)에 견주어 낮춰 부른 이름입니다.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성불한 지 매우 오래이니라. 수명이 한량없는 아승지겁이어서 항상 머물러 있고 멸하지 않느니라.
여기에 「내가 곧 부처요 법계」라는 화엄 사상을 더하면, 부처님의 몸이 법계에 가득하다는 게송이 터무니없는 말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단번에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는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알고 바로 믿는 일은 「저 좀 잘되게 해 주십시오」, 「그래, 잘되게 해 주마」 하는 식의 은근한 거래와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지금 우리 절집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 바로 그런 거래입니다.
장광설과 시방
게송 뒷부분의 광대한 음성은 장광설(長廣舌)을 말합니다.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 설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시방(十方)은 열 방향입니다. 한자대로라면 「십방」이라 읽어야 하지만, 불교에는 이렇게 소리를 달리 내는 말이 더러 있습니다. 도량(道場)을 「도장」이라 읽지 않는 것도 같은 경우여서, 기도도량이라고 할 때 장(場)을 「량」으로 읽습니다.
열 방향은 동서남북과 그 사이의 동북, 서북, 동남, 서남, 그리고 위와 아래입니다. 위아래가 들어가는 것은 방향을 지도 같은 평면이 아니라 공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말은 열 방향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공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쓰입니다.
정리하면 이 게송은 사람의 생각이 닿지 않는 우주 곳곳에서 부처님이 언제나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고, 중생을 건지려는 자비가 늘 함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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