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타니파타 소품의 다섯째 장은 다시 붓다와 야차의 대화입니다. 그런데 첫머리가 제1품 열째 장인 알라바카 야차와 거의 같아서, 알라바카 자리에 수칠로마를 넣어도 될 정도입니다. 물론 묻는 내용과 붓다의 답은 다릅니다.
이런 점에서 숫타니파타는 잘 편집된 경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품과 장의 내용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입으로 전해지던(口誦) 가르침이 문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붓다가 설한 순서를 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외워 전한 것을 모았으니 앞뒤를 가르는 기준도 모호했을 것입니다. 숫타니파타가 가장 오래된 경전 가운데 하나라 해도, 붓다의 가르침이 입멸 후 수백 년 동안 입으로만 전해지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에야 문자로 적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큰 흠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긴 세월 동안 붓다 깨달음의 정수인 연기 말고도 적지 않은 부분이 다시 힌두교적 사상으로 기술되었을 가능성은 조심스럽게 살펴야 합니다. 백 년만 해도 한 세기입니다. 우리는 백 년 전 우리 역사의 생활과 일상적인 사고방식조차 쉽게 짐작하지 못합니다. 붓다의 사상은 워낙 혁신적이었고, 인도인에게 힌두교적 사고는 지금도 3,000년 전과 거의 같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오랜 세월이 숫타니파타에도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겼으리라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알라바카 야차와 같으므로 건너뛰고, 본문인 게송만 옮깁니다. 수칠로마 야차가 붓다에게 묻습니다.
탐욕과 미움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소름끼치는 일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어린이들이 묶어둔 까마귀를 놓아 버린 것처럼, 우리의 망상은 어디로부터 생기는 것입니까?
붓다의 답은 바깥이 아닌 자신을 가리킵니다. 탐욕과 미움도, 좋고 싫음과 소름 끼치는 일도 자신에게서 생깁니다. 아이들이 묶어 둔 까마귀를 놓아 버리듯 온갖 망상도 자신에게서 일어납니다. 그것들은 쾌락을 좇는 감각에서 일어나 자신에게서 드러납니다. 칡덩굴이 나무를 타고 뻗어 나가듯 사람들은 대개 감각적 쾌락에 얽매여 있습니다.
어디에서 생기는가를 바로 아는 사람들은 그 번뇌의 원인을 없앨 수 있다. 들으라 야차여, 그들은 건너기 어려운 거센 물결을 건너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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