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 모든 여래가 온갖 상을 멀리 떠나시니
만약 이러한 법을 능히 알면 이에 세간의 큰 스승을 보리라
혜등 보살의 게송입니다. 중생의 성질을 설명하는 불교 용어 가운데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번 받아들인 생각이나 모양에 자기도 모르게 매달리는 경향을 가리키는데, 곱씹어 볼 만한 말입니다.
한번 굳은 생각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은 누구나 압니다. 엎친 데 덮친 격, 곧 나쁜 일이 겹칠 때 쓰는 말이고 국어사전에도 그렇게 풀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문을 깊이 공부한 이들 가운데는 이 말이 원래 정반대의 의미였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번 잘못 풀이된 뒤로 모두가 그 해석을 의심 없이 믿게 된 경우라는 것입니다.
글자대로 보면 설상(雪上)은 눈 위에, 가상(加霜)은 서리가 더해진다는 말입니다. 그 지적에 따르면 바른 풀이는 「눈이 온 뒤에 서리가 내려 봐야 별 흔적도 없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이 온 뒤에 서리까지 내리니 정말 너무하다」로 읽습니다. 서리를 지나치게 크게 보고 눈은 하찮게 여기는 해석입니다.
그 지적이 맞다 해도 시험에 그렇게 적었다가는 틀린 답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한번 굳어 버린 해석은 이만큼 힘이 셉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믿고 있으면 그것이 틀렸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게송 첫머리의 「일체 모든 여래」도 살펴볼 만합니다. 일체(一切)와 「모든」은 같은 말을 겹쳐 쓴 것입니다. 一切라는 한자는 「일체」와 「일절」 두 가지로 읽힙니다. 일체로 읽으면 모든 것이라는 의미가 되고, 일절로 읽으면 한 번 끊는다, 한 번 나눈다는 쪽의 의미가 됩니다.
지금은 종이를 A4, B4 같은 규격으로 부르지만, 예전에는 큰 갱지를 몇으로 나누었느냐에 따라 4절지, 8절지, 16절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술집 벽에 붙은 차림표도 「안주 일체」라고 써야 맞습니다. 「안주 일절」이라고 하면 안주를 끊어 버린다는 말로 읽힐 수 있습니다.
연화색 비구니와 수보리
게송에 나오는 여래는 부처님을 달리 부르는 이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온갖 상(相)을 멀리 떠나신다」는 구절입니다. 앞에서 설상가상과 일체 이야기를 길게 꺼낸 것도 이 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전합니다. 부처님이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 하늘 세계에 올라 법을 설하고 사람의 몸 그대로 내려오신 적이 있습니다. 이때 대중 가운데 가장 먼저 부처님 앞에 나아가 예를 올린 사람은 연화색(蓮華色) 비구니였습니다. 신통이 뛰어났던 그는 전륜성왕의 모습으로 몸을 바꾸어 왕과 대중보다 앞서 부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먼저 부처님을 뵈었다고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제가 가장 먼저 부처님을 뵙고 예를 올렸습니다.」
부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네가 아니라 멀리 기사굴산에 머물고 있는 수보리다.」
칭찬은커녕 무안을 당한 연화색 비구니가 놀라 다시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저는 지금 부처님을 눈앞에서 뵙고 있고 수보리는 멀리 산에 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은 내 몸뚱이일 뿐 참된 여래의 모습이 아니다. 여래의 모습은 색신(色身)에 있지 않고 법(法)에 있다. 수보리는 숲에 있지만 선정에 들어 공(空)을 관하고 있다. 그래서 너보다 수보리가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상을 떠난다는 말의 핵심입니다. 『금강경』의 이름난 사구게도 같은 말을 합니다.
무릇 있는 바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짧은 구절이지만 제대로 풀자면 책 몇 권으로도 모자랍니다. 그래도 설상가상이나 일체 같은 예가 왜 의미가 있는지는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양, 한번 옳다고 받아들인 생각에 쉽게 붙들립니다. 연화색 비구니가 눈앞의 몸을 부처님으로 여긴 것도, 우리가 설상가상을 의심 없이 읽는 것도 같은 습관에서 나옵니다. 아란야행이나 공 같은 낱말은 앞으로도 자주 나오니 지금 다 알아 두지 않아도 됩니다.
불교는 눈으로 확인되는 것, 생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에서조차 벗어나라고 거듭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이 근본 정신을 크게 비틀어 불교를 우상 숭배이자 미신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라는 것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곡이니 귀가 들리지 않던 베토벤이 지었을 리 없다는 주장을 믿으라는 것보다 더 무리한 요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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