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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이 번뇌에 뒤흔들려 분별과 바라는 바가 한 가지가 아니라
마음따라 업을 지음이 이해하기 어려워 모든 세계 바다가 이에 성립되었네

 

보현 보살의 게송입니다. 이번에는 누구나 아는 낱말이지만 불교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두 용어, 번뇌와 업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번뇌와 백팔

번뇌는 쉽게 말해 우리를 괴롭히고 고민하게 하는 생각입니다. 수행에서 말하는 번뇌는 이보다 한층 깊어서, 깨달음을 가로막는 모든 생각을 가리킵니다. 불법에 매달리는 마음,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까지 번뇌로 봅니다.

번뇌라고 하면 흔히 백팔번뇌를 떠올립니다. 중생의 걱정이 어디 108가지뿐이겠습니까만, 이 숫자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감각을 맡는 눈, 귀, 코, 혀, 피부, 생각 여섯 가지를 육근(六根)이라 하고, 그 대상인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법 여섯 가지를 육진(六塵)이라 합니다. 여기서 법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일으키는 형체 없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바깥의 육진이 내 안의 육근과 만나 번뇌가 일어나니 6 곱하기 6으로 36이 됩니다. 우리는 이 번뇌에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시달리니 다시 3을 곱해 108이 나옵니다.

정신의학 쪽의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하는 걱정의 95% 이상은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근심, 그리고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일에 대한 염려라고 합니다.

업을 이해하는 첫 번째 길

다음은 업(業)입니다. 업은 아주 중요한 개념이고, 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 삶과 폭넓게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 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학 입시를 예비고사로 치른 세대라면 기억할 만한 영어 예문이 있습니다. 예전 참고서들이 부정관사 a를 설명하면서 첫머리에 싣던 문장입니다. 「A Newton cannot become a Shakespeare.」 뉴턴은 셰익스피어가 될 수 없다고 옮기기 쉽지만, 바른 풀이는 「뉴턴 같은 위대한 과학자는 셰익스피어 같은 위대한 문학가가 될 수 없다」입니다.

과학, 문학, 예술, 사업 어느 분야든 크게 성공하거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삶을 보면 교육으로 만들어진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아무리 말려도 좋아서 매달리다가 끝내 일을 내고 맙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일을 내게 만드는 무엇, 그것이 바로 그의 업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 원인이 되는 것이며, 그 원인은 이번 생의 것일 수도, 전생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업은 불교의 또 다른 핵심인 인과법과 깊이 이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인과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옆 사람의 뺨을 한 대 쳐 보면 됩니다. 그것이 인(因)이 되어 틀림없이 어떤 과(果)가 돌아올 테니까요. 왼뺨을 맞고 오른뺨을 내미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참된 기독교인일 것입니다.

이 정도면 지금 이 순간의 업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남는 것은 전생의 업입니다. 타고난 재능을 예로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전생을 설명하려면 윤회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업이라는 것이 정말 있겠구나 하는 확신을 얻는 데까지만 가 보겠습니다.

업을 이해하는 두 번째 길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신과학 운동이라는 흐름이 있습니다.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세상을 부분보다 전체로, 기계적 관계보다 상호작용으로, 주체와 객체가 나뉜 것보다 하나로 어우러진 것으로 보려는 사고의 전환입니다. 기존 과학계가 모두 반기는 흐름은 아닙니다.

이 흐름에 속한 한 생물학자는 형태공명이라는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형태를 기억하는 에너지의 장, 곧 형태장이 생물을 둘러싸고 그 성장과 발달에 계속 영향을 준다는 주장입니다. 그는 실험실 쥐에 관한 오래된 연구들을 다시 검토하면서, 그 결과들이 형태공명으로 설명된다고 보았습니다.

실험실에서는 쥐가 동물 행동 연구의 기본 재료로 널리 쓰여 왔기 때문에, 쥐에게 새 재주를 가르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에 관한 자료가 아주 많이 쌓여 있습니다. 그는 이 자료들만으로 자기 이론이 완전히 증명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1920년부터 1954년 사이에 이루어진 비슷한 실험들에서 그동안 풀리지 않던 결과가 나왔고, 형태공명이 그것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준다고 보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1930년대 미국의 한 심리학 교수가 한 실험입니다. 그는 쥐들에게 물에 잠긴 구불구불한 미로를 빠져나오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면 전기 충격을 주어 다시 길을 찾게 했습니다. 잔인하게 들리지만 당시 동물 실험에서는 흔히 쓰던 방법이었습니다. 처음 훈련받은 쥐들은 이 기술을 익히는 데 아주 오래 걸렸고, 수백 번이나 실수를 되풀이한 쥐도 있었습니다.

그 쥐들에게서 난 다음 세대를 같은 방식으로 훈련하자 새끼들은 부모 세대보다 빨리 길을 익혔습니다. 그다음 세대는 더 빨랐습니다. 교수는 이를 근거로 살면서 얻은 형질이 유전된다는 획득형질 유전설 쪽에 섰습니다. 당시에는 멘델 유전학이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획득형질의 유전을 완전히 부정하고 진화는 변이와 자연선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학설과 맞서는 논쟁이 아직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형태공명은 묘하게도 불교의 업과 닮았습니다. 앞의 쥐 실험을 다시 떠올려 보면, 앞 세대가 고생하며 익힌 것이 뒤 세대의 배움을 한결 쉽게 만들었습니다. 한 개체가 지은 업[因]이 그가 속한 무리 전체에 어떤 결과[果]를 낳는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 이론의 예로 자주 거론되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일본의 생물학자들이 여러 외딴섬의 원숭이를 30년 동안 관찰했습니다. 규슈 동쪽 바다의 한 섬에는 마카크 원숭이 무리가 살았는데, 학자들은 원숭이를 관찰하기 좋은 곳으로 끌어내려고 바닷가에 먹이를 놓아 두었습니다. 그 가운데 흙 묻은 고구마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원숭이들은 고구마를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다 유난히 영리한 암컷 한 마리가 물에 씻어 먹는 방법을 찾아냈고, 이것이 무리에 퍼져 몇 년 사이에 많은 원숭이, 특히 젊은 원숭이들이 고구마를 씻어 먹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암컷은 민물 대신 바닷물에 고구마를 씻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더 깨끗하고 간도 짭짤하게 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도 차츰 많은 원숭이가 그 행동을 따라 했습니다.

바닷물에 씻어 먹는 원숭이가 100마리쯤 되었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마치 핵반응이 일어나듯 섬의 원숭이 전체가 하루 만에 이 방법을 알게 되었고, 아무 접촉이 없던 다른 섬의 원숭이들에게까지 같은 습관이 퍼졌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백 번째 원숭이」 이야기입니다. 백 번째 원숭이를 고비로 고구마 씻는 습관이 거대한 형태공명을 일으켰다는 설명입니다. 다만 이 백 번째 원숭이 대목은 실제 관찰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며, 뒤에 한 작가가 덧붙여 퍼뜨린 이야기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내가 짓는 업이 세계를 이룬다

두 가지 길을 모아 보면, 내가 하는 행동은 나의 미래뿐 아니라 나와 관계된 모든 것에 영향을 준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관찰하는 쪽이 관찰되는 대상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 읽어,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불교 사상과 견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게송으로 돌아가 봅니다. 번뇌에 물든 마음을 따라 짓는 업이 헤아리기 어려워 모든 세계 바다가 이로써 이루어졌다고 했으니, 앞의 이야기와 잘 들어맞습니다. 세계 바다의 바다는 물로 된 바다가 아닙니다.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부르듯, 끝없는 우주 곳곳의 세계를 바다에 빗댄 말입니다.

세계가 업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은 멀리 있는 우주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품은 생각과 한 일이 쌓여 내 삶의 모양을 만들고, 그것이 다시 함께 사는 이들의 삶에 스며듭니다. 이 게송이 일깨우는 것은, 나 한 사람이 품는 생각과 하는 행동이 나의 앞날과 모든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스스로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업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이것을 아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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