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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모양을 그린 게송

그 모양 둥글고 혹은 모났으며 혹은 다시 세모나고 팔모났으며
마니바퀴 모양과 연꽃 모양들이라 모두가 다 업 때문에 다르도다

 

보현 보살이 세계의 형상을 노래한 여러 게송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세계가 우주 규모의 단위를 가리킨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헷갈리는 것은 이 표현을 비유로 읽어야 하는지, 실제 모습으로 읽어야 하는지입니다.

『법화경』 「견보탑품」에는 칠보로 된 탑이 땅에서 솟아 허공에 머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으로 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엄경』의 세계 묘사는 그렇게 넘기기에는 너무 구체적입니다.

이 의문을 푸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우주망원경이 찍어 보낸 우주 사진들입니다. 소용돌이 은하 M51, 수레바퀴 은하, 초신성 1987A, 게 성운, 고양이 눈 성운 같은 사진을 보면 게송이 말하는 둥근 모양, 바퀴 모양, 연꽃 모양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게송의 형상은 은하와 성운, 초신성 같은 것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천 년 가까운 옛날에 이미 우주의 구조를 알고 경전에 적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에 이르면 삼매의 힘으로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얻게 되는데, 불교에서는 이 능력을 신통(神通)이라 부릅니다. 일상에서 「그것 참 신통하네」라고 할 때의 신통도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세계 바다를 일으키는 방편

모든 부처님의 갖가지 방편문으로 온갖 모든 세계 바다를 일으키사
다 중생들의 마음에 즐김을 따르시니 이것은 여래의 좋은 방편의 힘이로다

 

이어지는 보현 보살의 게송은 그 갖가지 세계 바다를 부처님이 방편으로 일으키신다고 말합니다. 방편이 무엇인지는 『법화경』 「여래수량품」의 비유가 잘 보여 줍니다.

지혜롭고 총명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약 처방과 약재를 훤히 알아 어떤 병이든 잘 고쳤고, 아들이 열, 스물, 백에 이를 만큼 많았습니다.

의사가 일이 있어 다른 나라에 간 사이, 아들들이 독한 약을 잘못 먹고 독기가 퍼져 정신을 잃고 땅에 뒹굴었습니다. 돌아온 아버지를 보자 아들들은 반가워하며 절하고 무릎 꿇어 말했습니다. 「저희가 어리석어 독약을 먹었습니다. 부디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아버지는 처방에 따라 빛깔과 향기와 맛을 모두 갖춘 약재를 구해 찧고 섞어 내주며 이 약을 먹으면 금방 낫는다고 일렀습니다. 본래 마음을 잃지 않은 아들들은 약이 좋은 것을 알아보고 바로 먹어 나았습니다. 그러나 본래 마음을 잃은 아들들은 아버지를 반기고 병을 고쳐 달라고 하면서도 약은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독기가 깊이 들어 좋은 약을 나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생각했습니다. 「가엾구나. 독에 마음이 뒤집혀 나를 보고 기뻐하면서도 좋은 약을 먹지 않는다. 방편을 써서 이 약을 먹게 해야겠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늙어서 죽을 때가 가까웠다. 이 좋은 약을 여기 두고 가니 가져다 먹어라. 나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그러고는 다른 나라로 가서 사람을 보내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고 전하게 했습니다. 아들들은 크게 슬퍼하며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우리를 가엾이 여겨 구해 주셨을 텐데, 이제 타국에서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구나.」

늘 슬퍼하던 가운데 뒤집혔던 마음이 본래대로 돌아왔고, 아들들은 그제야 약의 빛깔과 향기와 맛이 훌륭한 것을 알아보고 먹어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아들들이 나았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돌아와 그들을 만났습니다.

이 비유의 본뜻은 이렇습니다. 부처님에게는 본래 태어남도 죽음도 없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열반에 드는 모습을 중생에게 보여 아쉬움과 다급한 마음을 일으키고, 그 마음으로 미루지 않고 불법에 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방편은 선교방편(善巧方便)의 줄임말로, 부처와 보살이 중생을 건지고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쓰는 교묘한 방법을 말합니다. 방편바라밀은 십지 보살 가운데 제7지에 이른 보살이 닦는 주된 수행이기도 합니다. 『화엄경』 「명법품」은 십바라밀을 설하면서 방편바라밀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온갖 세간에서 짓는 업을 일부러 나타내며, 중생을 교화함에 게으르지 아니하며, 그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을 나타내며, 모든 행하는 일에 물들지 아니하며, 혹은 범부를 나타내고 혹은 성인의 행하는 행을 나타내며, 혹은 생사를 나타내고 혹은 열반을 나타내며, 모든 행위를 잘 관찰하며, 온갖 엄숙하고 거룩한 일을 나타내면서도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모든 갈래에 두루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나니, 이것이 곧 방편 바라밀다를 행함이니라.

 

이렇게 보면 방편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수행의 높은 경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절에서 벌이는 불사나 행사를 신도가 공덕을 짓게 하려는 방편이라며 떳떳이 내세우고, 기복적이고 불교답지 않은 일까지 방편이라는 이름을 쓰고 버젓이 행해지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일차적인 책임은 승가에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방법이 잘 통하고, 바른 길을 지키려는 절은 신도들이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우리 불교의 앞날이 걱정스러운 까닭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신도 수를 늘리는 포교보다 불교 안의 불교답지 않은 요소를 걸러 내고, 바로 알고 바로 믿게 하는 개혁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 불교에는 무방편(無方便)이 오히려 가장 좋은 방편일지 모릅니다. 방편의 본뜻을 이렇게 새겨 두면 게송은 따로 풀이하지 않아도 충분히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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