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이는 모든 것이 무상하며 모든 법이 공하여
나가 없음을 관찰하고 모든 형상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근수 보살의 게송입니다. 앞에서 아공(我空)을 이야기할 때는 공이라는 개념을 일부러 내려놓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게송에는 공(空)이라는 글자가 그대로 나오니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공을 설한 본뜻이 그런 고민 자체에서 벗어나라는 데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한 것이 사실입니다.
공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공 하면 금방 떠오르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그나마 쉬운 편입니다. 공 사상을 설하는 반야부(같은 사상의 경전을 묶어 부르는 이름) 경전은 방대해서, 한문으로 옮겨진 『대반야바라밀다경』 하나만 600권에 이르고, 산스크리트 반야경 가운데에는 십만 송에 이르는 것도 있습니다. 용수(2~3세기 무렵)가 『대품반야경』을 풀이한 『대지도론』은 후진(後秦)의 대번역가 구마라집이 100권으로 한역했는데, 어렵기로 이름이 높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서로 변명거리를 마련해 두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은 물론 역대 조사(祖師)들도 공을 두고 고심하셨습니다. 그러니 설명이 납득되지 않거나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로 여기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과 해탈
공을 체득하는 것이 곧 해탈인가, 그리고 해탈이 곧 성불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화엄 교학에서도 널리 쓰는 52위(位) 체계는 보살의 수행 단계를 쉰두 계단으로 나눕니다.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가 각각 열 단계씩이어서 쉰 단계가 되고, 그 위에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이 있습니다.
등각은 깨달음이 부처의 정각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부처라고 부를 수는 없어서, 부처에 견주면 보살이고 십지에 견주면 부처라고 합니다. 보살로서는 마지막 몸이 되는 자리입니다. 묘각은 지극히 묘한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모든 번뇌를 끊고 지혜가 원만하여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는 행이 두루 갖추어진 자리, 곧 위없는 정각을 이룬 부처의 자리입니다. 여러 해설이 대체로 이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부처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많은 계단이 있고, 등각조차 아직 부처가 아니라면, 공을 체득하는 것이 불법의 모든 일을 해결해 주는 수행의 끝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해설서 가운데에는 공을 체득하는 것이 곧 수행이 완성되는 깨달음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장면이 『유마경』에 있습니다.
유마힐의 집에 한 천녀(天女)가 있었습니다. 여러 어른들의 설법을 듣고 있던 천녀가 모습을 드러내어 하늘 꽃을 보살들과 큰 제자들 위로 뿌렸습니다. 보살들 위에 떨어진 꽃은 모두 땅으로 흘러내렸지만, 큰 제자들 몸에 떨어진 꽃은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신통력으로 떼어 내려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천녀가 사리불에게 왜 꽃을 떼려 하느냐고 묻자, 사리불은 이 꽃이 출가자의 법도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천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꽃 자체는 아무 분별도 하지 않는데 당신 스스로 분별하는 생각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출가자가 불법 안에서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법도에 맞지 않는다. 보살들에게 꽃이 붙지 않는 것은 모든 분별을 이미 끊었기 때문이다. 겁 많은 사람에게 귀신이 틈을 타고 들어오듯, 생사를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는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이 틈을 타고 들어온다. 두려움을 떠난 이에게는 이 다섯 가지 욕망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번뇌의 습기가 남아 있으니 꽃이 붙는 것이고, 습기가 다한 이에게는 꽃이 붙지 않는다.
천녀에게 이렇게 망신을 당하는 이가 하필이면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하나이자 『반야심경』에서 설법을 듣는 사리불입니다. 『유마경』은 그 까닭을 불법에 대한 분별이라고 말하지만, 상대가 사리불이니 공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읽어도 무리가 없습니다. 공에 관해서라면 한 수 위라는 사리불도 이렇게 꼼짝 못 하는데, 공을 불법의 만능 열쇠로 굳게 믿는 중생의 처지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연기
공은 연기법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연기(緣起)는 간단히 풀면 서로 의지하여 일어남입니다. 흔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고 설명하는데, 이 말이 오히려 더 헷갈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남자라면 아버지, 아들, 이모부, 고모부, 형, 동생, 아저씨, 사장, 선생, 학생, 사위, 장인, 남편, 총각, 독자, 주인, 손님 같은 호칭 가운데 몇 개는 해당되고 몇 개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아들이라는 호칭을 골라 봅시다. 내가 아들인 것은 부모라는 아주 한정된 상대가 나를 그렇게 보기 때문입니다. 결혼해 자식이 생기면 나는 아버지가 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나를 아들이라 불러 줄 사람도 없어집니다. 내가 아들이라는 인식 자체가 상대적이고 한시적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제 남편이라고 소개하면 고개 숙여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나 이혼을 하거나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면 어디서도 남편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그 자리에는 홀아비라는 말이 대신 들어섭니다.
내가 아들이거나 남편이라는 생각은 연기의 측면에서 보면 상대적이고 일시적으로 생겨난 것이어서 공합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이제 내 아들이 아니라고 야단을 치셔도 아무렇지 않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비어 있음
불교 사전을 찾아보면 공은 먼저 비어 있음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불교가 신비주의적이거나 염세적인 종교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고, 불교 신도 가운데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절에서 듣는 법문 대부분이 세상의 돈과 명예는 허망하니 집착하지 말라, 그래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강조합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 법문을 듣는 사람 가운데 집착을 걱정할 만큼 돈과 명예를 가진 사람보다, 악착같이 벌어야 마음이 편해질 사람이 더 많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부처님 당시 승단을 지탱하고, 부처님이 떠나신 뒤에도 승단이 이어질 틀을 마련해 준 이들은 경전에서 장자(長者)라고 부르는 신흥 부호들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재가자에게 재산을 넷으로 나누어 한 몫은 생활에 쓰고, 두 몫은 일에 쓰며, 나머지 한 몫은 어려울 때를 대비해 모아 두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돈이 있어야 보시도 할 수 있고, 내 코가 석 자이면 남을 도울 수도 없습니다. 불자는 나만이 아니라 모르는 남을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벌고 더 노력해야 합니다.
게송에서도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돈도 명예도 무상합니다. 그러나 슬픔도 고통도 번뇌도 똑같이 무상합니다.
한국 불교가 능동적이고 현실적인 불교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처님은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사시다가 길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불교만큼 삶에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종교는 드뭅니다.
부처님은 평생 갠지스강 유역의 여러 나라를 걸어 다니며 중생을 건지셨습니다. 권력자의 눈으로 보면 매우 위험한 인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태어난 신분으로 사람의 귀천이 정해지지 않는다고 가르치셨고, 그것을 승단 안에서 실제로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출가하면 출가 전의 신분은 모두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가장 높은 바라문 출신이라도 나중에 들어왔다면 천민 출신의 선배 제자에게 예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이 일이 2,500여 년 전에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박해를 받기는커녕 여러 나라의 왕들이 앞다투어 공양을 올리고 법문 듣기를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불교를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불교의 미래가 보입니다. 거친 비유를 들자면, 훌륭한 주제를 담은 영화를 만들어 놓고 관객을 모으려고 포스터를 자극적인 장면으로 채우는 식의 잘못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상을 말할 때는 괴로움도 덧없다는 것을 함께 말하고, 공도 무(無)를 떠올리게 하는 설명보다 유(有)를 떠올리게 하는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우주 공간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듯이, 우리의 생각과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 말할 수 없는 실상을 공이라 한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유에 대한 집착을 막으려고 공을 무 쪽으로 설명해 온 세월이 2천 년이 넘었으니, 이제는 방법을 바꿀 때가 되었습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렇게 생각을 이어 가면 『법화경』의 이름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묘법은 진공묘유(眞空妙有)로 새길 수 있고, 『법화경』이 드러내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은 『금강경』의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본다(見諸相非相)」와 통합니다. 『법화경』이 『화엄경』과 더불어 불교의 진수를 담은 경전으로 꼽히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실상을 이해하면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공, 『법화경』의 실상을 함께 이해하게 됩니다. 실상이란 간단히 말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마루에서 책을 보던 남자가 살짝 열린 쪽대문 너머로 호박밭에 다소곳이 앉아 일하는 아가씨를 봅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아침 이슬 같습니다. 바로 저 여자다 싶어 망설이던 남자는 다가가 수줍게 말합니다.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아가씨는 깜짝 놀라 남자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습니다. 한참 뒤에 땅만 보던 아가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저기요, 지금 볼일 보는 중인데 다 보고 나서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젊은이의 절망은 쉽게 짐작이 갑니다. 적외선을 느끼는 뱀 같은 감각이라도 있었다면 그 자리의 실상을 알아챘을 텐데 하는 동정심마저 듭니다. 이 젊은이의 절망이나 앞에서 본 사리불의 망신이나, 결국 육신의 눈에만 기대고 그 이면의 실상을 놓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은 몸과 마음을 이루는 다섯 무더기, 곧 오온(五蘊)이 모두 공함을 지혜로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과 재앙을 건넌 뒤, 사리불에게 색, 수, 상, 행, 식이 모두 공하다고 일러 줍니다. 색, 수, 상, 행, 식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색만 공한 것이 아니라 나의 앎, 곧 식(識)도 공합니다. 대부분 색, 곧 물질이 공하다는 설명에서 그치고 식이 공하다는 것은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생각에 집착하는 방식으로 공을 이해하려는 모순이 되풀이되고, 유식학(唯識學)의 아뢰야식에 거듭 매달리게 되기도 합니다.
불교 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들의 병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단계가 공부의 중요한 고비인 것은, 여기까지 오면 무언가 보일 듯하고 이것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기 때문입니다. 수행에서는 어떤 확신이 오는 바로 그 순간, 그 마음이 마(魔)가 될 수 있습니다.
게송 풀이는 하지 않고 문제 제기만 늘어놓는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소홀히 해 온 결과, 오늘의 한국 불교는 부처님의 불교인지 조사들의 불교인지, 승가를 위한 불교인지 방편으로 버티는 불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배경과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공을 이해하는 길은 멀고 험할 것입니다.
이번 게송의 요점은 「모든 법이 공하여 나가 없음을 관찰하고」입니다. 『반야심경』의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와 꼭 같은 말입니다. 법은 영원하고 모든 것을 다 품기에 감히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도, 형상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존재 자체, 곧 실상이 모두 법이라는 큰 긍정의 말이 공입니다.
경전에 수없이 나오는 이 말이 한자를 거치지 않고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에서 바로 우리말로 옮겨졌다면, 빌 공(空) 자와는 다른 뜻을 가진 우리말이 골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게송 끝의 「모든 형상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도 형상에 매달리지 말고 그 뒤의 실상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업은 행위 뒤에 남는 마음의 찌꺼기 (0) | 2026.11.06 |
|---|---|
| 욕심을 불심으로 착각하는 일과 어리석음이라는 독 (0) | 2026.10.29 |
| 부처님 몸의 서른두 가지 모습 (0) | 2026.10.28 |
| 나의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1) | 2026.10.22 |
| 법이 환술과 같다는 말 (0) | 2026.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