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과보가 업을 따라 나는 것이 꿈과 같아서 진실하지 않으며
순간 순간 항상 소멸하여 앞과 같이 뒤도 역시 그러니라
비유하건대 깨끗한 거울이 사물을 따라서 형상을 나타내듯이
부처님의 복의 밭도 이와 같아서 마음을 따라서 온갖 과보를 얻느니라
앞의 것은 덕수 보살, 뒤의 것은 목수 보살의 게송입니다. 두 게송이 이어지듯 과보(果報)를 말하고 있어 함께 읽습니다. 과보는 업과 맞물린 문제라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습니다.
「온갖 과보가 업을 따라 나는 것이」라는 첫 구절을 보면 과보가 업의 결과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업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과보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마음의 찌꺼기
업을 몸과 입과 뜻의 세 가지, 곧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나 번뇌의 가짓수를 108개로 못 박을 수 없듯이 업도 이 셋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업은 흔히 생각하듯 행위의 결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와 함께 남는 마음의 잔재가 업을 만듭니다.
글을 읽으며 책장을 넘기는 행위가 업이 될까요. 아무 업도 되지 않습니다. 책장을 넘기는 데에는 마음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행위 뒤에 남는 이 마음의 찌꺼기가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을 만들어 냅니다. 무위(無爲)나 『금강경』의 무주상(無住相)은 이 찌꺼기가 전혀 남지 않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금강경』의 무주상보시가 과보를 바라지 않는 보시인 것도 그래서입니다.
남조 양나라를 세운 양무제(梁武帝)는 곳곳에 절을 짓고 스님들을 공양하며 불교를 일으켰습니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달마 대사에게 내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달마는 공덕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자 달마는 양나라를 떠나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갔다고 전합니다. 양무제가 공덕을 물은 순간 이미 무주상은 깨진 것입니다.
선업과 악업
선업을 지었다고 해서 자신이 지은 악업이 상쇄되지는 않습니다. 선업 둘에서 악업 하나를 빼면 선업 하나가 남는 셈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 좀 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업은 선업대로, 악업은 악업대로 따로 받습니다.
게송에 견주어 보면, 첫 게송의 「온갖 과보가 업을 따라 나는 것이」는 선업과 악업을 따로 받는다는 말이고, 둘째 게송 끝의 「마음을 따라서 온갖 과보를 얻느니라」는 마음의 찌꺼기가 남았느냐 남지 않았느냐를 가리킵니다.
한 전쟁사 기록에 이런 일이 실려 있다고 합니다. 1945년 5월, 패전을 앞둔 독일에서 소련군 탱크가 쏜 포탄에 건물이 무너지면서 한 소년병이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소련군 지프 위로 떨어져 소년은 살았고, 지프에 타고 있던 소련군 사단장은 목뼈가 부러져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소년병과 사단장은 어떤 업으로 얽혀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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