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 급고독원에 머물던 어느 날 탁발을 나가 불을 섬기는 바라문 바라드바자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 집에는 성스러운 불이 피워져 있고 제물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바라드바자는 멀리서 붓다가 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습니다.
까까중아, 거기 섰거라. 가짜 사문아, 거기 섰거라. 천한 놈아, 거기 섰거라.
붓다는 그에게 되묻습니다. 당신은 천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나 하느냐고, 사람을 천하게 만드는 조건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느냐고요. 바라드바자는 그 조건을 알지 못하니 이치를 일러 달라고 청합니다.
이번 대화 상대는 불을 섬기는 바라문인데, 붓다를 대하는 태도가 몹시 무례합니다. 당시 바라문은 네 계급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를 깔보고 천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몸에 밴 듯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를 제대로 만났습니다. 붓다를 향해 던진 '까까중', '가짜 사문'이라는 말이 뒤집혀, 오히려 바라문 쪽이 그릇된 길을 걷는 천한 수행자가 되고 맙니다.
그 무렵 인도에는 저마다 다른 수행을 하는 집단이 많았고, 불을 숭배하는 수행자도 많았습니다. 붓다의 교단이 갑자기 천 명 남짓으로 늘어난 것도, 불을 섬기던 카사파(Kassapa) 삼형제가 제자 천 명과 함께 한꺼번에 귀의했기 때문입니다.
천한 사람의 조건
붓다의 첫 대답은 이렇습니다.
화를 잘 내고 원한을 품으며, 악독하고 시기심이 많고, 남의 미덕을 덮어 버리고, 그릇된 소견으로 남을 잘 속이는 사람,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이어지는 구절들도 모두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로 끝납니다. 마을과 도시를 부수고 약탈해 폭군으로 이름난 사람, 마을에서든 숲에서든 남의 것을 제 것이라 우기며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사람도 천한 사람입니다. 빚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고 갚을 빚이 없다고 발뺌하는 사람, 증인으로 불려 나가 자기나 남을 위해, 또는 재물 때문에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몇 가지는 종교의 가르침이라기보다 공공의 질서를 위해,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양심에 가깝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물론 이런 윤리적 교훈은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창조주나 절대적 능력을 지닌 신을 세우고 그를 통한 구원을 목표로 하는 종교에는, 때로 '신의 논리'가 '인간의 논리'를 밀어내 버릴 가능성이 들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두 가치가 부딪쳐 한계에 이르면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불교는 사람이 곧 부처를 이룬다고 보는 종교, 사람을 부처의 마음 씨앗을 키우는 존재로 보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런 충돌이 생길 자리가 없습니다. 『숫타니파타』가 보여 주듯 가르침의 중심도 일상의 작은 마음 씀에 있습니다.
아래 구절들을 보면 불교가 얼마나 윤리를 중시하는 종교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재물이 풍족하면서도 늙고 쇠약한 부모를 섬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부모와 형제자매, 장모를 때리거나 욕하는 사람, 나쁜 짓을 하고 아무도 모르기를 바라며 숨기는 사람입니다. 남의 집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도 그가 손님으로 왔을 때 정성껏 갚지 않는 사람, 자기를 내세우고 남을 깔보며 교만 때문에 도리어 비굴해진 사람도 천한 사람입니다.
행위가 정하는 신분
붓다의 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깨달은 사람을 비방하거나 출가와 재가의 제자들을 헐뜯는 사람도 천한 사람이라고 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나라[범천梵天]를 포함한 세계에서, 사실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라 자부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천한 사람입니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인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서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윤리의 문제를 넘어 불교의 정체성에 관한 말이라 매우 중요합니다. 범천(梵天)은 브라만교에서 가장 높은 신의 세계이고, 붓다 당시 바라문 수행자들의 목표는 바로 이 범천에 태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붓다는 바라문교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여기는 그 하늘나라 사람도 천한 사람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숫타니파타』의 많은 부분이 바라문교를 비판하는 데 쓰이지만, 이렇게 직설적인 경우는 드뭅니다.
게다가 붓다는 천한 사람이든 바라문이든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의 행위로 정해진다고 단언합니다. 전생의 업(業)이 신분을 결정한다는 당시의 사상에 대해 분명하게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붓다는 이 확신을 실제로 실천했기에 교단 안에 계급의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끝내 쇠퇴한 까닭은 여러 방면에서 따져 볼 수 있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계급 차별에 불교가 분명히 반대했던 것이 한 이유였으리라 짐작할 근거는 충분합니다. 오늘날 불교 일부에서 전생의 업을 들먹여 신도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고 보시를 끌어내는 손쉬운 해석이 보이는 것도 이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크게 우려할 일입니다.
'천한 사람'의 경은 불을 섬기던 바라문 바라드바자가 붓다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귀의해 제자가 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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