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각은 그 생각을 일으키는 대상, 곧 물질이나 자연이나 사람이 만들어 내는 현상이 있어야 시작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생각은 말과 글로 표현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데 누군가 어떤 생각을 처음으로 해냈다면 그것을 어떤 말로 남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처음 떠올린 생각이니 기존의 말 가운데 꼭 맞는 낱말이 없어 고민했을 것입니다.
진화론을 처음 세운 학자도 그 이론을 처음 펴낸 책의 초판에서는 '진화(進化)'라는 낱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음 밝혀낸 것은 생명체가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변해 간다는 이론이었지, 그 이론을 부를 낱말이 아니었습니다.
붓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기(緣起)가 나를 포함한 온 우주가 존재하고 움직이는 원리라는 사실을 사람 가운데 처음으로 깨달았지만, 그 깨달음을 설명할 언어까지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당시의 말 가운데 중생이 가장 가깝게 알아들을 수 있는 개념을 골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업과 윤회는 물론이고, 필요하면 천상(天上)의 신들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업, 윤회, 신처럼 지금도 불교에서 쓰는 친숙한 말들은 붓다 이전부터 인도에서 아주 흔하게 쓰이던 용어였습니다. 이 경에 나오는 야차도 당시 인도의 여러 신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문제는 연기를 체득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쓰이는 업, 윤회, 신이라는 말은 겉말은 같아도 그 실제 내용이 사뭇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불교는 이런 낱말의 겉모습뿐 아니라 그 뜻까지 다시 힌두 사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야차(Yaksa)는 붓다가 인정한 존재가 아니라 인도 베다에 나오는 신의 하나로, 한자로는 야차(夜叉) 또는 약차(藥叉)로 음역합니다. 헤마바타 야차는 히말라야의 눈 덮인 산에 사는, 사람의 능력을 넘어선 신입니다. 경에 나오는 포살(布薩)은 보름마다 열던 참회 의식입니다.
두 야차의 대화
삿타기라 야차가 오늘은 보름이라 포살하는 날이고 신성한 밤이 가까웠으니, 세상에서 뛰어난 스승인 붓다를 뵈러 가자고 말합니다. 헤마바타 야차는 그분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 마음을 잘 다스리는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욕심을 누를 수 있는지 묻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는지, 마음이 물들지 않았는지, 어리석음에서 벗어났는지, 세상의 현상을 본질까지 꿰뚫는 지혜의 눈이 있는지도 묻습니다.
삿타기라 야차는 그 모든 물음에 그렇다고 답합니다. 헤마바타 야차는 성자의 마음은 말과 행동에 드러나는 법이니 밝은 지혜와 맑은 행을 갖춘 그분을 찬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수긍합니다. 그리고 두 야차는 진리를 가르치고 모든 이치에 통달했으며 원한과 두려움을 넘어선 고타마에게 직접 물어보자고 뜻을 모읍니다.
설산(雪山) 야차 헤마바타와 칠악(七岳) 야차 삿타기라는 이렇게 붓다가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 서로 이야기한 뒤, 직접 확인하러 찾아갑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붓다가 평생 모든 중생에게 강조한 내용과 맞닿아 있어서, 야차들의 안목도 인정할 만합니다.
여섯 가지를 다스려라
붓다의 답은 여섯 가지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란 눈, 귀, 코, 혀, 몸, 생각으로, 사람의 감각 기관입니다. 생각을 감각 기관이라 하는 것이 어색할 수 있지만, 생각은 뇌에서 일어나고 뇌는 몸의 일부이니 감각 기관이라 해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을 생각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여섯 가지에 들어가는 생각은 마음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헤마바타 야차가 묻습니다. 무엇으로 세상이 생겨나고, 무엇으로 사랑하게 되며, 사람들은 무엇에 집착하고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겪느냐고요. 붓다는 여섯 가지로 세계가 생기고, 여섯 가지로 사랑하게 되며, 사람들은 그 여섯 가지에 집착하고 그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답합니다.
세상에는 다섯 가지 욕망의 대상이 있고, 생각은 그 여섯 번째 대상이다. 그런 여섯 가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면 곧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붓다는 덧붙여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나 계를 잘 지키고, 지혜가 있어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살피고, 간절한 원이 있는 사람만이 건너기 어려운 거센 물결을 능히 건널 수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떠나 마음의 걸림을 떨치고 욕정을 다스린 사람은 깊은 바다에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삿타기라 야차는 이 답을 듣고 기뻐합니다.
오늘 우리는 맑고 밝은 새벽을 만나 눈부신 태양을 맞이했습니다. 거센 물결을 건너 번뇌의 때가 묻지 않은, 깨달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천이나 되는 야차들은 신통력과 명예를 지녔지만 모두 붓다께 귀의하며, 깨달은 이와 그 가르침에 예경하면서 마을에서 마을로, 산에서 산으로 다니겠다고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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